안동규 (사)한국분권아카데미 원장·한림대 교수

길이 화두다. 프랑스에서 스페인 서북단까지의 800 ㎞ 순례자의 길로 유명한 산티아고의 길이 우리나라에도 알려지면서 제주도의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변산반도 마실길, 강원도 산소길, 관동별곡800리 등 전국적으로 길이 뜨고 있다.

작년 12월 말에 가족과 함께 올레길을 3일간 체험했다. 그동안 자주 가던 제주도였지만 이번에는 남달랐다. 차를 버리고 발로만 다니던 제주도가 다르게 보였기 때문이다. 차를 타고 돌아다니는 제주도는 하루면 다 끝내는 여행지였는데 내발로 걷는 제주도는 크고 아름답게 다가오고 있었다.

과거에는 목표지를 잡아서 성산포 찍고, 외돌개 보고, 정방폭포 사진 박고, 중문에서 호텔 구경하고, 횟집에서 회 먹고, 점 중심으로 돌아다녔다. 이번 가족여행은 가족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고 사진 만들고, 감상하고, 걷다가 쉬다고 놀다가, 길위에서 음식점 찾아서 먹고, 또 걷고, 외돌개에서 월평까지 네시간 선으로 다녔다. 점 중심으로 본 제주도와 선중심으로 경험한 제주도는 맛이 다르고 느낌과 시각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 이튿날의 올레 6코스인 쇠소깍에서 외돌개의 네시간 길에서 소위 놀멍, 걸으멍, 쉬멍하며, 온식구가 하나되는 느낌이었다.

이중섭미술관도 코스 중에 있었기에 별미였다. 바닷길과 도시길과 농촌길을 동시에 걷게 되는 뷔페음식같은 다양성과, 가족과 오랫동안 걸으며 자연스러운 대화를 통한 일체감, 느리게 걷는 여유와 스트레스 없는 한적감, 아름다운 경치가 주는 황홀감까지 걷기에 가능한 체험이다.

길은 무엇인가? 길의 철학이 무엇일까? 왜 사람들이 길에 관심을 두는가? 길은 도로와 다르다. 길은 걷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고 도로는 차와 산업과 경제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길은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고 도로는 사람이 만들고 개발한 것이다. 길 위에는 인생과 삶과 철학이 있고 도로위에는 산업과 경쟁과 과학이 있다.

길은 소통이고 도로는 속도다. 도로에는 일이 있지만 길에는 관계가 있다. 도로에는 차가 있고 길에는 사람이 있다. 도로는 사업을 위해 바쁘고 길은 만남을 위해 여유롭다. 도로는 도시중심이고 길은 지역과 시골중심이다. 도로는 중앙집권에 필요하고 중앙집중적이지만 길은 분권적이고 지역중심적 분산적이다.

지난 18일 전국의 길쟁이들을 모아 길포럼을 강원도에서 하기로 했다. 길을 꾸미고 만들고 사진을 찍고 길관련 책을 쓰는 사람들이 모여 포럼을 만들기로 했다.

도로는 산업이지만 길은 문화다. 길은 공동체다. 한 개인과 건설회사가 돈으로 만드는 도로와는 달리 길에는 각종 볼거리 먹을거리 이야깃거리 놀거리 쉴거리 등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창조하는 문화가 필수적이다. 강원도에는 복원시켜야 될 옛길이 많다.

단종이 유배갈 때 걸었던 슬픔의 길, 신사임당이 걷던 길, 정철의 관동별곡길, 폐광지역의 광산길, DMZ 분단과 평화의 길, 동강길, 북한강길, 백두대간길, 소팔러 가던 횡성한우길…. 수없이 아름다운 길들이 있다. 서울사람들이 강원도에 관광와서 걸어야 강원도가 산다. 걸어야 잠을 자고 잠을 자야 돈을 쓸 것이다.

도로중심의 자동차 여행은 지역경제에 별 도움이 안 된다. 관광객들이 길을 걷도록 길을 창조해야 한다. 문화와 스토리텔링이 있는 길창조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돈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강원도 도민, 춘천주민, 내가 사는 퇴계동 동민부터 걸어야 길이 보이고 길이 창조되는 것이다. 길을 사랑하고 길을 자주 걷고 길 위에서 생각을 하고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내가 갈 길을 만들고 그것이 바로 길문화요 길의 철학이다. 길을 걷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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