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문섭 논설위원

삼성을 창업한 故 이병철 회장은 67세에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던 전날 밤 자녀 6명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삼성의 후계자에 대해 처음 입을 연다.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가도록 하겠다."

당시 장녀 이인희, 장남 이맹희, 차남 이창희 등 참석자들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이병철 회장은 그의 저서 '호암자전'에서 "삼성을 보존시키는 일은 삼성을 지금까지 일으키고 키워온 일 못지않게 중요하므로 후계자 선정은 덕망과 관리능력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말해 장남과 차남을 배제시킨 이유를 소상히 적고 있다.

창업보다 어려운 것이 수성임을 간파한 것이었을까? 미래에 대한 통찰력과 균형 잡힌 사고를 잘하기로 유명한 이건희 회장은 87년 이병철 회장이 작고하자 삼성그룹 2대 회장에 취임한다.

그 이후 1993년 그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신 경영'이라는 화두(話頭)를 처음으로 제시하면서 '나부터 변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그가 주창했다는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다 바꾸라"던 말은 한국 사회를 한바탕 뒤흔들면서 결국 국가도, 기업도, 개인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변화 마인드를 사회에 널리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때 등장한 화두 중에는 '메기론'도 있다. 미꾸라지를 키우는 논 두 곳 중 한쪽에는 메기를 넣고 다른 한쪽은 미꾸라지만 놔두면 메기를 넣은 논의 미꾸라지들이 더 통통하게 살이 찌는데 이유는 메기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민첩하게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신 경영 이후 삼성은 10년간 매출액 3.4배, 이익 28배를 기록하며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회장이 내걸었던 '질 경영'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화두 중 하나였다.

'초일류기업으로 거듭나려면 세계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며 품질의 중요성을 주문한 것.

95년 3월9일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무선전화기와 팩시밀리, 휴대전화 등 15만대의 불량제품 500억원어치를 불태운 것도 질 경영을 강조한 사례다.

2000년대 들어 그는 '글로벌 경영'을 주창하며 눈을 세계시장으로 돌렸다.

2003년에는 '천재론'으로 국내 기업들이 인재확보 전쟁에 나서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2005년에는 '디자인 경영'을 내세웠는데 이 역시 삼성전자 TV가 세계 1위에 오르는 밑거름이 됐다는 분석이다.

2006년 그가 내놓은 화두는 창조경영이었다. 삼성이 더 이상 따라잡을 모범이 없는 세계일류 기업이 된 지금 창조적 발상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경영철학을 내비친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삼성이 잘 나간다는 주위의 평가가 나돌 때 거꾸로 위기론을 펴며 삼성의 미래를 내다보는 포석을 뒀다. 그리고 그가 던진 경영의 화두는 삼성뿐만 아니라 재계와 사회 각 분야에도 빠른 속도로 확산되곤 했다.

지난 3월24일 경영에 다시 복귀한 이 회장이 이번에는 '삶의 질'을 화두로 제시했다. 그동안 질 좋은 제품을 만들었으니 이제는 사회와 개인의 삶의 질도 높여야 한다는 기업보국의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다.

이 회장이 이번에 발표한 신수종 사업은 태양전지, 자동차용 전지, LED, 바이오제약, 의료기기 등 5개 분야다.

회장 복귀 한 달 반 만에 23조원이라는 어마어마한 투자결정을 내린 그의 스피드 경영이 어떤 성과로 이어질지 벌써부터 결과가 자못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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