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증평농협 하나로마트

저는 충북 괴산군 문광면이라는 작은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중학교를 마쳤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친구들처럼 일반계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청주 양백여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양백여상에서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공부했지만 대학 진학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친구들이 뽐내며 대학에 입학할 때 청주공업단지에 있는 '대농'이라는 회사에 취업했습니다.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면서 사회생활도 배우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멋도 내고 꿈도 많았던 21살이 되던 어느 봄날 푸른 군복을 입은 멋진 군인 아저씨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후 군인아저씨는 나와 평생을 함께 할 남편이 되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여느 부부들처럼 함께 의지하고 사랑하며 신혼의 단꿈을 꾸었습니다. 남편과 저는 가정 형편 때문에 첫 딸을 낳고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습니다.이후 우리 부부는 두 딸을 더 얻었으며, 저는 세 아이의 엄마로, 남편의 아내로, 시할머니와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습니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아이들의 재롱과 시부모님의 사랑 덕분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막내 딸 백일 무렵 건강하던 남편이 갑자기 피곤해하는 등 건강에 적신호가 찾아왔습니다. 병원에서 의사선생님이 "남편은 백혈병을 앓고 있다"고 거짓말 같은 진단을 내렸습니다.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어둠과 어린 세 딸의 모습이 눈 앞을 가로막고 늙으신 시부모님 걱정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저는 남편을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시켜 정성을 다해 간호했습니다. 그런데 저의 정성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하늘이 무심한 것인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저의 남편은 투병생활 10개월 만에 저와 어린 자식들을 멀리하고 이 세상과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 때 제 나이 32살 그리고 9살, 7살, 2살 배기 세 딸을 남기고 남편은 그렇게 떠나갔습니다.

남편의 빈자리는 정말로 컴컴한 어둠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절망에만 빠질 수는 없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자식을 위해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아빠를, 시부모님들에게는 아들을 잃게 한 죄인이란 생각만 들 뿐 아무 생각이 없었습니다. 정신 차리고 평정심을 찾는 데만 2년여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부업도 했고, 아이들도 아빠가 있을 때 보다 더 정성스럽게 챙겼습니다.

99세의 시할머니와 시부모님도 정성을 다해 모시며 몸도 마음도 쉴 틈 없이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힘들고 슬프고 삶이 버거웠지만 누구에게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습니다.

35살때 우연히 증평농협 하나로마트 직원채용 공고를 보고 이력서를 냈는 데 다행히 시간제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워졌습니다. 지금도 그 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시할머니는 3년 전에 돌아가시고 시부모님들도 연로해 병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세 딸은 어느덧 고3, 중3,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습니다.

저에게 작은 바람이 있다면 우리 지원이, 동경이, 지은이가 아빠의 소망처럼 언제나 최선을 다하며 바르게 자라는 것이고, 또 하나 있다면 어머님, 아버님 오래오래 사시는 것입니다. 아직도 힘에 부치고 가끔은 내려놓고 싶은 짐이지만 언제까지나 꿋꿋하게 앞으로만 나아 갈 것을 사랑하는 세 딸과 하늘에서 언제나 날 응원해주는 남편에게 약속합니다.

"여보 걱정 마세요. 당신이 먼 밖에서 우릴 지켜주고 있으니 이 세상이 두렵지 않아요. 저와 우리 세 딸은 아빠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기 위해 오늘도 화이팅 할게요."마지막으로 "여보 보고 싶어요! 그리고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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