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에서-김재훈 충주고 교사

알을 깨고 태어나다니? 박혁거세 이야기인가? 그렇지 않다. 새는 알을 깨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새가 되어 날 수 없다. 인류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우리가 존경하는 철학자 중에는 그 시대의 모든 틀을 깨버린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가 주목하는 창의성 또한 자신이 가진 현재의 틀을 벗어나는 지혜를 가진 용기가 있어야 하지 않은가? 자 그러면, 소크라테스, 에피쿠로스,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삶속으로 들어가 보자.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가 판을 치던 아테네에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외치며 소피스트들의 헤게모니에 도전한 사람이다. 출세를 위해서는 대중앞에서 그들을 홀리는 연설을 잘해야 성공할 수 있는 당시에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방법을 돈을 받고 가르치는 교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교육을 받고 대중앞에서 유창하게 연설하던 사람들 모두 소크라테스의 몇 가지 질문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위기의식을 느낀 소피스트들은 소크라테스를 누명 씌워 법정에 세우고, 사형 선고를 내린다.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소크라테스에게 탈옥을 권유하는 제자도 있었지만, 그것은 오히려 소피스트들이 바라는 바, 소크라테스는 그럴리 없다. 소피스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악법도 법이다'를 외치며 사약을 받아 마셨다.

에피쿠로스는 누구인가? 쾌락주의자인가? 쾌락주의자라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당시는 헬레니즘 시대로써, 이전의 폴리스가 무너지고 사람들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불안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중요한 건 마음의 안정이었다. 마음의 안정을 위해서는 만족의 개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열 번찍어 안넘어가는 식의 삶이 아니라 못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않는 식의 삶을 살 것을 역설한 사람이 에피쿠로스이다. 빵과 물만으로도 행복했던 사람, 오두막을 지어놓고 전원생활을 하며 행복을 추구한 사람이다. 인간 욕망의 끝없음을 알고, 그것을 사전에 잘라버리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고 역설한 에피쿠로스의 삶속에서 무소유의 지혜를 배운다.

신 중심의 세상이 천년간 이어지던 중세 말기에 살았던 데카르트,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의심하였다. 내 눈앞에 보이는 너는 사람이냐? 1+1=2가 맞더냐? 너는 신기루일 수 있고, 1+1=2는 악마가 우리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다. 도대체 확실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던 데카르트가 어느날 무릎을 탁! 치면서 유레카를 외쳤다. 너가 사람인지 아닌지 보다 더 확실한 것을 그렇게 '의심하는 나'의 존재가 먼저라는 사실, 악마가 우리를 속인다면 '속고 있는 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이것이 신중심의 세상에서 인간중심의 세상으로 옮겨오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오늘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 도대체 무슨 의미를 지닌 말일까?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이 싫어서 유대교를 버린 사람, 그래서 '영원히 저주받을 지어다' 라며 유대인 사회에서 파문시킨 사람, 평생을 떠돌이 신세로 살면서 자신의 철학을 연구한 다락방의 합리론자,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일지라도 모두 신적인 존재라고 생각한 범신론자, 그래서 우리의 냉철한 이성으로 이 범신론적인 우주 자연을 제대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철학을 연구한 사람, 이 철학자에 감동되어 교수로 임용하겠다는 제의와 거액을 기부할 테니 편안하게 연구만 하라는 제의를 모두 거부하고 오로지 자신의 길을 간 사람, 스피노자. 헤겔은 스피노자의 삶에 감동을 받아 너희들이 철학자의 길을 가려면 스피노자를 본받으라고 하였다.

창의성을 추구해야 하는 21세기의 우리들에게 위의 철학자들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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