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선 교육평론가

'공부쟁이'란 말을 들어보셨는지. 기성세대들은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을 것이다. 필자도 처음 들었다.

버스 안에서였다. 일단(一團)의 학생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공부쟁이'란 말을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다. 집에 와서야 아이들이 이런 말을 일상적으로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학교 아이들은 어떠니? 노는 아이들 보다 '공부쟁이'들이 많니? 그 애는 심한 공부쟁이니?" 이런 식으로 쓴다는 것이었다.

원래 '-쟁이'란 사람의 성질, 독특한 습관, 행동, 모양 등을 나타내는 말에 붙어 그 사람의 특징을 규정해주는 말이다. '고집쟁이', '허풍쟁이'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쟁이가 공부란 단어 뒤에 연결되어 묘하게 쓰이고 있었다.

# 공격감정 내포한 '공부쟁이'란 말

우리는 일상에서 특정 단어나 용어가 풍기는 뉘앙스에 따라 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안다. 예를 들면 '강원도 감자바위' 하면 강원도 사람들을 비하하는 말임을 금방 알 수 있다.

나아가 이런 말들은 공격적 감정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부쟁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이면에는 공격적 감정이 숨어 있다는 것.

어려웠던 시절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그런 모습은 모두에게 귀감이 되었고 너나 할 것 없이 이를 본받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의 공부는 주변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해야만 하는 눈치 밥이 되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친구들에 대한 배려를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범생이'라며 왕따시키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왕따의 후유증이 무섭다. 왕따를 당했던 아이들은 예외 없이 피해의식에 시달린다. 학교를 거부하거나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고립된 생활을 하기도 한다.

이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정상적인 일상생활이 어렵다. 이 뿐만이 아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경우도 발생한다.

필자가 상담했던 사례다. 학생은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전교1등을 하던 학생이다. 그는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런데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친구들이 그를 왕따시켰다. 그는 이때 받은 심리적 충격으로 심한 우울증을 앓게 되었고 주변과의 관계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정신과 상담은 물론 최면치료까지 받았다. 하지만 아직도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또 다른 경우도 있다. 그는 친구들이 무섭고 지금도 자신을 감시한다는 생각을 한다.

활발한 친구였지만 과거의 모습은 사라지고 늘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인다. 공부는 하고 싶은데 학교는 너무 외로운 곳이라고 말한다. 현재도 병원에서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 왕따, 집단폭력이란 인식 필요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학창시절의 이런 왕따 경험은 성인이 되어서도 심각한 문제를 불러온다. 앞서 지적했듯이 청소년들이 목숨을 버리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도 왕따가 원인이다. 학교현장에서 왕따문제를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이유다.

문제는 또 있다. 왕따를 보는 일부의 잘못된 시각이다. 왕따를 당할 만하니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시각은 마치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이 행실이 어땠으면 그랬겠느냐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

이야기가 확장되었지만 이런 현상들이 청소년 시기의 특징이라고 해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공격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은 문제다. 공부쟁이든 범생이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지 못하는 우리사회의 분위기가 투영된 것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우리 모두가 풀어가야 할 어려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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