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오 소설가

싸움이 벌어졌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누구의 잘못도 아니면서 둘 다의 잘못이기도 한 말다툼이.

저녁 뉴스 시간. 여늬와 다르게, 가시(각시)가 뉴스를 보고 버시(사내)는 요리책을 읽고 있다. 한쪽은 심각하고 한쪽은 즐겁다. 똑같은 컬러판을 앞에 놓고는.

심각한 여자가 탄식을 한다. 애고머니나…… 이를 어쩌나!

남자가 지나가는 말로 거든다. "뭔 일인데, 전쟁이라도 났데"

철없는 반딧불이가 방충망 틈에 끼어 버둥거린다. 바람 탓이다.

"앙드레김 선생님이 돌아가셨데요" "난 또…그 사람한테 돈 빌려 준 거라도 있어"

"뭐예요" "그렇잖아.내사 암만 따져도 그 사람하고 당신하고야 아무 관계도 없지 싶다. 하기사 당신 같은 사람이 패션 보는 눈이 있기나 하고. 패션은 모르지만 보는 눈은 있다. 돼지 허리통에 루비똥 걸쳐봤자"

"머어욧!"

여자가 벌떡 일어선다. 눈에선 불똥이 튀었다. 무채를 썰던 사내가, 어이쿠 이게 아닌데 싶어 자리를 뜬다. 창문을 타고 넘은 담배 연기가 빗줄기 사이로 재빠르게 도망간다. 구미호 꼬리 같다. 바람이다.

희뿌옇게 건너다보이는 슬레이트지붕. 갈천 칠 개 리는 물론, 단양읍내까지 용하단 소문이 짜하게 퍼진 점집. 남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을 주면서도 정작 자신은 늘 곤궁하여, 장날만 되면 로또복권 숫자 맞추기로 바쁜 각시무당이 사는 집. 그 집 깃발이 펄럭인다.

바람 때문이다. 순백이었을, 그러나 지금은 풍파에 삭을 대로 삭아, 갈퀴바람처럼 헤진 잿빛.

장대살로 퍼붓는 빗줄기를 고스란히 맞아가면서도 당당하게 펄럭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바람뿐이다.

바람!

누구는 인생의 8할이라고 했으나 내가 보기엔 인생은 그 자체가 바람이다.

태어난 곳도 바람곶이요, 떠나간 이를 기다리는 곳도 바람언덕 아닌가. 기다림이 오래고 오래되어, 저 잿빛의 깃발처럼 가슴에 멍이 드는 것이 바램이니, 소원이고 희망이란 이름에 다름 아니지 않겠는가.

은행문을 드나들던 바람을 품으면 재벌을 꿈 꿀 것이요, 명예를 좇던 바람을 품으면 고관대작을 꿈 꿀 것이며, 무소유의 담백하고 청아한 바람이 품에 안기면 자유인이 되기를 바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각자에겐 나름대로의 간절하고도 소중한 바일 것이고 보면, 바람이 이르는 대로 신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미친 듯이 미쳐서 한점 후회도 없이.

어떤 이는 말한다. 희망이 없다고. 이놈의 세상, 아무리 발버둥거려봤자 낙은커녕 살아가는 게 욕일뿐이라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묻고 싶다. 바람 없는 날 달려 본 적 있냐고.

축 쳐진 가로수 사이, 바람 한 점 없을 것 같은 그 뙤약볕 아래서도 겨드랑이를 스치는 바람이 있다는 사실을, 달리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희망이란 또 그런 것이다. 달리다 보면 바람은 생기고, 바람이 바람을 불러오고, 그 바람을 의지해 창공을 유영하는, 연날리기와도 같은 것 말이다.

이제 우리, 바람의 노래를 들어보자.

앙드레김의 고별을 전해준 반딧불이의 바람이던, 뽀얀 담배연기를 실어간 바람이던, 어둔 하늘에 길을 묻는 점집 바람이든.

바람의 노래를 들으며 푸른 하늘을 자유하는 꿈을 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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