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학 충주여고 교장

오늘날 세계 언어는 3천여개가 있는데 그 사용자 수에 의하면 중국어(10억), 영어(4억5천), 힌두어(3억7천), 스페인어(3억5천) 등에 이어 한국어(7천5백만)는 12위에 랭크되어 있다.

언어의 기능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어느 민족, 또는 집단의 주체성을 확립시켜 주는 요소로서도 작용한다. 그런데 인간은 사상(事象)을 적확(的確)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고등 언어를 구사함으로써 본능을 초월한 동질성이나 배타성을 확보 내지 고집하기도 한다. 논쟁, 설득, 전수(傳授) 등이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수행되며, 몇몇 역사적 사례에서 비껴간 것도 있지만, 그 결과 사회는 발전해 왔다.

주로 논쟁과 설득으로 이루어지는 청문회나 토론회 등은 당자자의 공격과 방어 논리에 귀 기울여 볼만한 흥밋거리를 가지고 있어서 나름대로 '듣는 즐거움'을 준다.

문제는 날로 각박해 지는 사회상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현대의 언중(言衆)은 점점 강렬하고 자극적인 언어에 길들여 지고 있다는 데 있다. 이런 유(類)의 표현에서 매스컴도 예외가 아니다. 무엇보다 독자의 시선을 잡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말하자면, 지난 보선(補選) 때 여야의 승리 의석 비율이 5:3이었는데 매스컴은 일제히 야의 참패(慘敗)라고 보도했다. 물론 당선자의 개별적인 중량감이 다르다는 측면도 있지만 만일 8:0으로 어느 한쪽이 졌다고 가정할 때 이미 사용한 '참패' 말고 어떤 어휘를 붙일 수 있을까를 고려해 본다면 너무 극단적인 어휘가 아닌가 싶다.

한가로운 시골 마을에도 '결사 반대'라는 자극적인 플래카드가 종종 띈다. 도대체 무슨 일이 꼬였길래 목숨 걸고 반대한다는 것일까. 그냥 '반대'라고만 해서는 '찬성'할 구석도 있는 거라고 상대편이 얕잡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일까.

더 큰 문제는 비속어(卑俗語)의 범람이다. 일부 개념 없는 청소년의 입에서는 일상어로서의 욕설이 분출된다. 정상적인 언어로는 에너지 넘쳐나는 들끓는 자아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이른 바 군살녀(軍殺女)라고 지칭되는 어느 인강 1타 여교사의 수업 시간 말 씀씀이가 너무 자극적이고 비속해서, 여러 뜻있는 사람들의 공분을 산 적이 있다. 스스로 수업에 도취되어 자제력을 잃고 거기까지 갔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수업 시간에 교사들은 때로 이렇게 자기 도취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나 자신 경험으로도, 나이 든 교장의 훈화 패턴보다는 뭔가 각도를 달리하여 학생들에게 말해 주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으로 나름대로 각색을 하곤 했기 때문이다.

언중에서, 비교적 많은 양과 높은 질의 언어 구사를 필요로 하는 직업 중의 하나가 교사다. 이 경우 주된 언어 행위 유형은, 한쪽이 학습자(學習者)이기 때문에, 논쟁이나 설득보다는 전수에 치우치기 마련이다. 그래서 교사의 언어 구사 역량은 매우 치밀하게 직업 정체성과 연결된다.

<한비자> '설난'편에는 '무릇 유세(遊說)하기 어렵다 함은 나의 지식이 불충분하여 상대를 설복시키기 어렵다는 것이 아니다. 유세의 어려움은 상대방의 심정을 잘 살펴 파악하고 나의 주장을 거기에 적중시키는 점에 있다.'고 했다. 학생들이 자극적인 언어를 선호하기 때문에 인강 강사들이 막말, 폭언을 일삼는다면 할말이 없다.

하지만 언어 구사 행태는 그 사람 정체성의 발로(發露)다. 언어는 생각을 접거나 각색하여 나타나지 않는다. 한두 번 그렇게 스스로를 속이고 표출할 순 있겠지만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뒤따르는 자기 혐오감을 감당하기 어렵다.

그리고, 일단 자기 밖으로 표출되어 남에게 감지된 말, 읽혀진 글은 영원히 고정되어 수정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왜 두렵지 않겠는가.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