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중 소설가·충북교육청 장학관

텔레비전에서 진행되는 토론 프로그램을 지켜보노라면 혐오감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양비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핏대를 세우며 흥분하는 토론자가 반드시 한두 명은 끼어 있어 토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6·2 지방선거시 각종 매스컴을 통해 다양하게 진행된 후보자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경쟁 후보에 대한 비난만으로 시간을 메우는 후보자가 많음에 실망감과 함께 거부감을 가졌었다.

다른 후보자의 의견이나 주장을 경청한 뒤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는 것이 토론의 기본일 텐데 많은 수의 후보자가 상대방의 의견이나 주장을 일방적으로 매도한 채 검증되지 않은 자신의 주장만을 일방통행식으로 내세웠다.

요즘도 각종 사회적인 이슈를 두고 끊임없이 토론회가 열리고 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양비론적인 견해를 가진 인사가 출연해 토론회를 망치고 있다.

특히 어떤 쟁점을 두고 상반된 견해를 가진 정당이나 이익단체가 충돌했을 때 그 도는 더해진다. 상대방의 의견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은 채 마이동풍식, 동문서답식, 인신공격적 토론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명예훼손죄라든지 허위사실유포죄가 적용되지 않는지 무조건 색안경을 쓰고는 근거가 명확한 실적마저 비판하고 힐난한다.

칭찬할 것은 칭찬하고 헐뜯을 것은 헐뜯는 것이 토론의 기본자세일 텐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순전히 상대방에 대한 험담만으로 채운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이것도 잘못되고 저것도 잘못되고, 결국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는 양비론에 가까운 주장의 해악은 정말로 크다. 콕 집어서 양비론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정하는 음해성 발언은 차라리 양비론보다도 더 큰 해악을 지녔다는 생각이다.

모두가 잘 알다시피 양비론(兩非論)이란 내세우는 말들이 모두 틀렸다는 주장이나 이론을 말한다. 찬반의 대립 구조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의사결정에 장애만 된다.

홍세화라는 분은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라는 책에서 양비론을, 양쪽을 모두 비판하면서 양쪽에서 고루 자기 보신하는 기회주의적인 속성으로 보았다.

때문에 양비론을 펴는 것은 사회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토론을 죽이는 행위라고까지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권위주의적이었던 한국 전통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싸울 경우 부모들이 둘 다 잘못했다고 인정하고는 무조건 양쪽을 똑같이 벌주는 반면, 프랑스의 부모들은 싸움이 시작된 원인을 찾아낸 뒤 누가 더 많은 잘못을 했는지를 따져 그 잘못한 점에 대해 야단을 친다고 예를 들었다.

과거, 특히 제5공화국 시절, 여당의 날치기 법안 통과에 따라 여야 의원들이 몸싸움을 한 것에 대해 언론들이 날치기와 몸싸움 자체만 비판하고 그 원인에 대해서는 제대로 기사화를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여야 할 것 없이 정치인은 모두 나쁘다는 이미지만 심어줘 정치에 환멸을 느끼게 한 점도 양비론의 큰 폐해로 지적하였다.

필자는 지방선거시 몇 안 되는 후보자를 놓고 각 언론사들이 앞 다투어 열었던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같은 질문과 답변의 반복에 후보자들은 후보자들대로 식상하고 보고 듣는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식상하였기에 개선이 필요한 제도라고 여겼었다.

더욱이 양비론적인 견해를 가지고 토론회에 임하는 자격 미달의 후보자들이 많았기에 그 필요성에 고개를 저었었다. 다행스러웠던 것은 선거가 끝난 뒤 당선이라는 영광을 얻은 인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대부분이 토론의 기본을 지키며 신사답게 처신한 후보자들이었다는 점이다.

오늘도 각종 이슈를 두고 양비론적인 견해가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반드시 고쳐져야 할 못된 습성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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