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식 前 충북도중기센터 본부장

좀처럼 기세가 꺾이지 않던 더위가 태풍의 위력 앞에 꼬리를 내리는 듯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에어컨 없이는 살 수 없을 것 같더니 거칠게 몰아친 태풍이 계절을 어느새 가을문턱에 옮겨 놓았다. 이제 새벽에는 제법 서늘한 바람이 저절로 이불을 끌어당기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지난 주말 괴산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벌초를 다녀오는 길에 밭에서 일하고 계신 고향 어른을 만났다. 오랜만에 뵌 터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데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셨다. 이런저런 고향소식을 말씀하시던 어른께서 긴 한숨을 내쉬면서 한탄을 하셨다.

말씀인 즉, 얼마 전 무·배추 등 가을 채소를 갈아 여름내 정성을 쏟았는데 잦은 비로 모두 녹아버려 하나도 먹을 수 없게 됐다는 것이다. 벼농사도 그럭저럭 평년작은 될 것 같았는데 그나마 태풍으로 벼가 모두 쓰러져 부족한 일손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해마다 농사를 지어봤자 가격이 워낙 형편없다 보니 각종 농약 대금에 비료 값까지 '차 떼고 포 떼고'나면 남는 건 없고 오히려 적자라는 것이다. 여기에 가을 김장채소라도 갈아볼까 했는데 그나마도 가을장마로 농사를 망치니 하늘이 원망스럽기만 하다는 것이다.

어른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위로를 해드려야 할지 몰라 하고 있는데 그 어른께서 얼른 고추밭으로 들어가시더니 실한 고추를 골라 검은 비닐봉지 한가득 따셨다. "이거 보기보다 맛이 좋아! 농약도 별로 안했으니까 찬밥에 고추장 찍어먹으면 맛있을 겨"하며 고추 봉지를 건네어 주신다.

사양할 수도 없어 나무껍질처럼 갈라진 어른의 두 손을 꼭 잡아드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 발걸음을 옮기는데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순간 '아! 이게 바로 고향이구나!'하는 흐뭇한 생각이 들면서 벌초로 지친 몸이 가벼워지는 듯했다.

다산 정약용은 사람의 세 가지 즐거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어렸을 때 뛰놀던 곳에 어른이 되어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고 가난하고 궁색할 때 지나던곳을 출세해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고 나 혼자 외롭게 찾았던 곳을 마음이 맞는 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오는 것이 한 가지 즐거움"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추억이 있는 고향길이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항상 발걸음을 설레게 하는 곳. 가장 불안하고 힘들 때 돌아갈 수 있는 곳, 내 유년에 꿈과 희망을 키워주고 큰 기대를 해주신 분들에게 늘 마음의 부채를 안고 있는 고향이기에 그곳에 들어서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제 추석이 되면 고향으로 향하는 귀성객들의 행렬이 도로마다 줄을 이을 것이다. 수만리 바다 속을 헤엄쳐 자기가 태어난 강을 찾아와 알을 낳고 생명을 다하는 연어는 그 특유의 귀소본능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명절을 맞아 '민족대이동'으로 불리는 우리 민족의 본능 또한 이에 못지않다.

고향은 언제나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곳이다. 객고에 지친 나그네에게 고향은 마음의 안식처이자 새로운 힘을 채워주는 충전소이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살기가 힘들다고는 하지만 올 추석은 국민 모두가 고향의 따뜻한 정을 느끼는 명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동안 생활에 쫓겨 찾아뵙지 못했던 고향 어른들과 친지들에게 인사도 드리고 오랜 친구들과 술잔이라도 나누며 그동안 쌓인 회포도 풀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렇게 올 추석에는 우리 국민 모두가 따뜻한 고향의 품에서 그동안 쌓인 피로를 말끔히 씻고 다시 힘차게 뛸 수 있는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

여기에 하나 덧붙인다면 지금 우리 농촌은 쌀 소비가 줄고 재고량은 늘어나 어려움이 더해가고 있다. 추석을 맞아 고향을 찾은 길에 고향 쌀 팔아주기에 동참하는 뜻으로 고향 쌀 몇 포씩이라도 사 가지고 간다면 더 바랄나위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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