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오 소설가

어둠이 섬처럼 다가서면 외로움을 겉감으로 댄 고요의 장막이 켜켜이 쌓인다.

가로등 불빛이 배달부의 호출 대신 일렁이나,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는다.

등불이 꺼지고 잠자리에 들어서야 만날 수 있는 사람들. 가을엔 누군가가 기다려진다.

떨어지는 낙엽에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먹빛에 잦아드는 기러기 떼를 보며 한숨짓기도 한다.

소소히 날리는 바람을 따라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떠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하는 계절, 가을이 온 것이다.

그렇다고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돈 놀이를 한 적 없으니 빚쟁이가 올 것도 아니요, 서툰 연애질에 숨겨둔 사람이 있을 것도 아니다.

코흘리개 적 동무들이야 더러 있겠지만 가맣게 멀어진 옛날 얘기나 하자고 쌈짓돈 풀 위인들도 아니잖은가.

그러나 어찌하랴. 물빛은 저리도 맑아 오금 저릴 듯 명징하고, 색에 미쳐 날뛰던 산봉우리 더는 참지 못하고 활활 타오르는 생에의 마지막 잔치, 가을 아니던가.

휘적휘적 걷는 길에 마주한 은행나무. 긁기 복권의 첫 번째 숫자 만큼이나 반가운 은행잎.

초록에 지친 색깔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순하고 고운 빛깔이다. 지천에 널려진 게 은행 잎 이건만 지천으로 대할 수 없는 게 또한 은행잎이다.

손에 집어 든다. 떨린다. 바람 때문일까.

은행잎을 대할 때면 산국처럼 은은하게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달빛에 일렁이는 박꽃인 양 수줍어하던 모습. 빛바랜 사진처럼 백화 되어 이젠 기억에도 가물가물한 얼굴. 그 아련한 얼굴 위로, 그래도 그녀의 이름만큼은 금강석처럼 변함이 없다.

책갈피마다 정성스레 갈무려진 은행잎. 만지면 바스러질 것 같은 그 여리디 여린 이파리가 마치 그녀이기라도 한 듯. 육각의 하얀 모나미 볼펜으로 써보고, 쓰면서 떠올리고, 떠올릴 때마다 가슴 설렌 적이 그 몇 번이던가.

신의 조화일까. 우연의 일치일까. 아니면,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에 닿는다더니 진정 하느님을 감동시킨 걸까.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야 나 순자, 장순자, 누르실 웃담에 살던 순자, 모르겠니"

모를 리가 있겠나. 너무도 기급하고 당황하여 할 말을 잊었을 뿐이지. 그래, 그게 누구라고 그 이름이 어떤 이름인데, 그 이름을 잊었을라고. 아 장순자.

가슴은 불방망이처럼 쿵쾅거리고 전기로 지진 듯 온몸은 저려왔다. 혼 빠진 놈처럼 넋을 놓고 있자니 순자란 여자가 말했다. 교양은 물론 애교까지 넘쳐 났다.

다 큰 애들 뒷바라지한답시고 LA에 눌러앉아 있는 아내보다 더 친근한 목소리였다. 그 사이 변했을 법도 하건만 저리도 고울까.

반갑다고 이게 몇 년 만이냐고. 더듬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하긴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담임선생님 앞에 선 초등학생 꼴로, 그녀가 묻는 말에 대답만 한 것 같다.

며칠 후 아내한테 연락이 왔다.

당신 심부름이라며 사흘 전, 어떤 여자가 찾아와서는 무기명 채권을 맡기더란다. 고교 동창인 K은행장의 딸이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질 못하자, 오히려 아내가 화를 냈다. 요즘 달러 값이 떨어졌다고는 하지만 애들 일 년 치 생활비를 몽땅 채권으로 바꾸라면 어쩌냐고.

여기 계좌번호까지 적어주면서 결재해 주라고 한 사람이 누군데 딴소리냐고, 종주먹을 들이댔다.

그러면서 아무리 친해도 그렇지, 자기 아내 잠버릇까지 알려주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분통을 터뜨리는 게 아닌가.

눈을 감는다. 그 곱던 은행잎이, 긁기복권의 마지막 숫자로 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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