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희의 세상읽기]

어려웠던 시절. 시골에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소를 팔아야 했다. 목돈이 들어가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 시절 자식을 유학까지 보내 대학을 졸업시킨 부모들의 주름살은 그만큼 늘어만 갔다.

이렇게 소 팔아 대학을 졸업시켰다 하여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했었다.

쟁기질로 농사를 짓던 시절. 소(牛)는 농가의 재산목록 1호였다. 소가 없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소가 논·밭을 갈아야 농사가 시작됐다. 또 무거운 짐은 물론 퇴비나 농작물을 실어 나르는 수레를 끌고 다녔다. 주인의 자식이 대학을 갈 때는 제 몸을 팔아 등록금을 대 주었다. 우직한 소는 이처럼 평생 주인을 위해 일을 하고 모든 것을 주고 갔다.

그러기에 농부는 소를 상전 같이 보살피며 길렀다. 여름철이면 무더위에 지치지 않을까, 겨울철이면 추위에 떨지 않을까, 자식 돌보듯 애지중지 보살폈다. 쇠죽을 정성껏 끓여 먹이는 것도 그랬다.

이렇듯 상전 받들 듯 기르던 소를 잃어버린 농부는 가슴앓이에 식음을 전폐하기 일쑤다. 또다시 소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외양간을 탄탄하게 고쳤다. 외양간에 방울도 달고 안방과 연결되는 끈도 매 놓았다. 그리고 또다시 듬직한 소를 한 마리 들여 놓았다.

그런데 얼마 안가 이번엔 소가 외양간 안에서 죽었다. 새벽녘에 외양간을 둘러본 농부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외양간을 튼튼하게 고치고 나름대로는 보안장치까지 했는데도 소를 잃은 것이다. 간밤에 들짐승이 침입해 소를 죽인 것이다. 농부의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는 계속 됐다. 그때 그 시절 농촌의 소는 농가의 자식과 가족과 가정을 지켜준 대들보였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대규모 포사격을 시작으로 북한은 기습 남침을 했다. 이후 1953년 7월27일. 휴전이 조인되면서 정전(停戰)이 됐다. 그로부터 57년 후인 지난 23일 오후 2시 34분. 북한은 서해 연평도와 부근 해상에 또다시 해안포와 곡사포 150여발을 퍼부었다.

정전 상태에서 대한민국의 영토와 국민에게 무차별 포격을 가한 것이다. 이로인해 장병 2명이 전사하고 민간인 2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많은 장병들과 민간인들이 부상 당했다. 인명피해는 더욱 늘어날 것같다.

연평도는 '조기의 섬'으로 더 유명했다. 요즘엔 꽃게로 유명하다. 북녘 땅이 손에 잡힐 듯 바라보이는 접적지역으로 서해 최북단 우리의 영토이다. 오전에 바다에 나가 조업을 마치고 돌아온 어선 80여척이 부두에 닻을 내리고 잠시 쉬는 시간. 1천7백여명의 주민들이 평화롭게 생활하고 있는 어촌마을의 평화가 깨졌다. 지축을 뒤흔든 포탄의 굉음과 섬광은 온 섬을 불바다로 초토화 시켰다.

적의 공격에 우리 군도 즉각적으로 대응하여 북한의 포 기지인 황해도 강령군 개머리 기지와 무도 기지에 K­9 자주포 80여발을 사격했다. 공군 전투기도 긴급 발진하여 초계했다. 이같은 우리 군의 즉각적인 대응은 교전규칙에 따른 것이라고 군은 밝혔다.

연평도는 지난 1999년 6월15일과 2002년 6월29일 1·2차 연평해전이 일어났던 지역이다. 2차 연평해전 당시 북한군의 무력도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국민들의 여론과 지적에 우리 해군이 '교전 규칙'을 준수했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이번에도 늦장 대응 한 것아니냐는 똑같은 지적에 군 관계자는 또다시 올 초 개정한 '교전 규칙'에 따라 대응했다고 밝혔다. 그땐 이미 포격을 당하고 우리 국민이 생명을 잃은 후다.

물론 적의 공격이라 해도 우리의 지정학적 관계와 정치 외교등 모든 분야를 종합 판단하여 신속하게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교전 규칙'은 국민과 영토 그리고 주권을 확고하게 지킬 수있어야 한다. 국민들이 불안하지 않게.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교전 규칙이 그때그때 고쳐져서는 안된다. 평화를 위해서다. 전사한 장병의 명복과 함께 부상자들의 쾌유를 빈다. / 前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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