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광 섭 청주공예비엔날레 부장

오늘도 어김없이 상당산성을 다녀왔다. 차갑고 메마른 새벽 공기를 마시며, 그토록 찬연하던 낙엽은 지고 욕망의 옷을 훌훌 벗어버린 나목을 바라보며, 조물조물 정겨운 다람쥐와 산새 들새의 신명나는 합창소리를 들으며, 태양은 솟아오르고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과 구름을 벗삼아 무심한 세월을 이끼처럼 지내온 성곽을 돌면서 홀로 고요한 사색에 젖는다.

한 해가 저무는데 그간 나의 발걸음은 무익하지 않았는지, 행여나 나의 욕망과 이기 때문에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에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지, 하여 올 한 해도 구린내 나고 구차하며 막막한 일상의 연속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성곽을 한 바퀴 도는 내내 나는 누구이고 나의 삶은 어떠하며,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묻고 또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오직 한 없이 맑고 청량한 대지의 기운을 받은 숲과 성곽과 바람과 햇살만이 내 곁에서 유순하게 스밀 뿐이다. 그 와중에 내게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얼음골 아저씨다. 근 10년 가까이 하루도 빠짐없이 얼음 덩어리를 갖다 놓고 얼기설기 만든 나무의자로 산행하는 사람들에게 휴식과 안락의 곳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오늘도 구릿빛 얼굴의 얼음골 아저씨가 먼저 인사를 한다. 내친 김에 그에 대한 궁금한 몇 가지를 던졌다. 이곳에 얼음을 가져다 놓기 시작한 게 얼마나 됐느냐, 칡즙이나 팔면 그만이지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 밥벌이는 되느냐,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느냐….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을 법하고 흥미로운 대답이라도 들어볼 요량이었는데 그의 대답은 의외로 간결했다. 먹고 살기 위해 산성에서 칡즙과 음료수 장사를 하는 것이고, 이 때문에 목구멍에 풀칠을 할 수 있으니 그 고마움을 표현할 길을 찾다가 얼음을 갖다 놓게 된 것이며, 의자를 만들어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주변의 청소를 해 청결한 환경을 만들게 되었노라고. 자신의 삶도 산성에 펼쳐져 있는 수많은 생명의 부스러기에 불과하니 이 땅의 모든 생명이 함께 행복하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얼음골 아저씨의 기진한 삶 속에서 신비를 보았다. 그의 삶과 생각은 단순하지만 햇볕이 내리쬐듯이 양명했다. 욕망의 이기에 뒤틀려 있는 복잡다단한 나 자신과는 분명한 거리를 느꼈다.

그러고 보니 '나눔의 계절'이 돌아왔지만 "내 앞가림도 힘든데…"라며 한탄과 자조 섞인 소리뿐이었다. 내 코가 석자인데 이웃을 돌보고 가슴 따뜻한 시간을 만들며 함께 즐긴다는 것 자체가 낭비라는 생각이었다. 기업은 물론이고 가정마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으니 소외계층에게는 이번 연말이 춥고 배고픔으로 견딜 수 없는 시간이 될 것이다.

'나눔의 계절'을 경제적인 문제, 즉 돈으로만 해결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돈 보다 더 값진 문화이벤트를 통해 이웃들이 행복과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음악회나 전시공간, 쇼핑몰이나 공공기관이 나눔문화를 실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소액기부도 유행이다. 싸이월드와 블로그를 활용해 재능있는 사람을 찾고 그들이 함께 모여 복지시설을 찾아다니며 공연이벤트를 열기도 한다.

어려운 시기에 재능이라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자는 그들의 마음은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답다. 게다가 창작활동을 통해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고 재능을 키우며 이웃들과 더불어 함께 살겠다는 것은 문화가 갖고 있는 새로운 삶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안팎으로 어수선하고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상에 나눔문화는 어둠을 밝히는 가슴 따뜻한 빛이 될 것이다. 눈발이 거세다. 마른 가지에 홀로 남은 잎새 하나 처연하더니 하얀 눈꽃송이를 품에 앉고 힘없이 떨어진다. 햇살 좋은 어느 봄날, 한 줌의 흙이 되거나 어여쁜 한 떨기 꽃이 되리라. 더 늦기 전에 욕망의 옷을 벗고 나눔을 실천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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