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역경 겪으며 적도에서 극까지 토지측량

왕연중의 발명세상 <79> 프랑스의 '미터법 제정'



오늘날, 길이의 단위나 미터나, 무게의 단위인 그램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1미터나, 미국의 1미터는 꼭 같다.

그렇다면 미터를 만든 사람은 누구이며, 어떻게 해서 어느 나라에서나 같이 통용되고 있을까?

프랑스 정부에서는 국가적인 대상으로, 길이나 무게의 단위를 하나로 정해 세계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도록 하기 위해 유명한 과학자들을 불러들였다.

"여러분, 이 역사적인 사업에 모두 협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통용되려면 단위가 어떤 외부 조건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라야 할 텐데 무엇을 길이의 표준으로 하지요?"

학자들은 여러 가지로 의논을 거듭한 끝에 가장 확실한 표준으로 지구를 설정했다.

"그러니까 극으로부터 적도까지의 길이를 재고, 그 일천 만분의 일을 1미터로 정하자는 말이지요?"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재지요?"

"한 곳의 지상에서 자오선을 따라 어느 정도를 재고, 나머지는 계산으로 산출해 냅시다."

이리하여 1668년 삐가르를 출발점으로 시작된 이 측량 사업은 다른 여러 학자들에 의해 계승되어서 지중해 해안과, 영프해협 사이, 페루 북부 등을 답사하면서 진행되었다.

그러던 1789년 프랑스에 대혁명이 일어나 왕국이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우리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도 이 위대한 사업은 계속 추진하겠소."

이에 따라 학자들은 몇 개의 그룹으로 나누어 각지로 떠나게 되었다.

달랑베르 일행은 땅의 길이를 재는 데는 될 수 있으면 높은 곳이 눈에 표적으로 적당하므로 통나무를 베어 사다리처럼 높이 만들고 꼭대기에 흰 깃발을 달아 이것을 보면서 측량을 실시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동네사람들이 손에 무기를 들고 무섭게 달려와 일행을 에워쌌다.

"저 왕당파의 스파이를 잡아라."

달랑베르와 그 일행은 영문을 몰라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그들이 꽂은 흰 깃발이 혁명 시 국왕이나 귀족들의 상징이었음을 알고, 주민들이 오해했음을 설명해 주었으나 흰 깃발은 바꿔야 했다.

한편,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를 측량하러간 메샹이라는 학자와 그 일행도 많은 위험과 고초를 겪어야 했다. 그들이 측량에 필요한 장비와 기계를 들고 가지 그곳 주민들이 경계태세를 취했다.

"저 것 좀 봐, 악마가 왔어!"

이렇게 떠들며, 돌아가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메샹 일행은 주민들을 간신히 설득하고, 측량을 겨우 끝냈으나 이 지방을 습격한 무서운 전염병 페스트에 걸려 하루 밤새 피를 토하면서 죽어갔다.

남은 사람들이 새로운 마을이나 거리를 들어서려고 하면 페스트가 유행하는 동네에서 온 사람이라 하여 앞을 막았다. 메샹은 또 그들을 설득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여러분, 이 일은 국가적인 사업이니 협조해 주십시오. 아주 큰일입니다."

"좋소, 그렇다면 가지고 온 종이를 전부 초산에 적신 다음 들어오시오.'

당시 그 지방 사람들은 초산에 적시면 어떤 전염병도 예방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메샹은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병에 걸려, 프랑스에 돌아가지도 못하고 스페인의 낯선 땅에서 쓸쓸히 죽었다.

메샹의 뒤를 위어 아라고라는 학자가 파견되었다. 아라고 또한 메샹이 겪었던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필요한 토지의 측량을 끝내고 프랑스로 돌아왔다.

이렇듯 많은 학자들이 목숨을 걸고 실시한 측량에 의해 극에서 적도까지의 일천 만분의 일의 길이가 확정되었고 1793년 8월 1일 프랑스 정부는 이것을 법으로 정해 발표했다.

그런데 그 후, 극에서 적도까지의 길이가 서로 다른 것을 발견하고 1875년 24개국의 과학자들이 프랑스 정부 주최로 다시 모여 국제회의를 개최하여, 미터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서는 자오선 전체둘레 길이의 4천만 분의 1을 1미터로 정했다. / 한국발명문화교육연구소 소장, 영동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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