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뜨락-박종희

참 오래전의 일이다. 20여 년이 지난 아득한 기억 속의 목소리지만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내 귓전에서 맴도는 목소리가 있다. 가끔 고요한 산사에 가게 되거나 회색빛 적삼을 입은 스님들을 만나게 되면 그날 내게 걸려왔던 그 전화 속의 목소리가 어김없이 생각난다.

결혼 전 은행에 근무했었다. 내가 근무한 부서는 예금계 였는데 잔액조회며 입금조회로 하루에 예금계로 걸려오는 전화는 전화기가 몸살이 날 정도로 많았다. 그렇게 많은 고객과의 전화 통화 중에서 내 마음속에 이렇듯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목소리가 있다.

아침부터 꾸물거리던 하늘에선 하얀 눈발이 날리고 거리엔 크리스마스 캐럴 송으로 한창 들뜬 분위기였다. 마음은 얼른 업무를 마치고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려고 벼르고 있었지만, 잠시도 쉬지 않고 걸려오는 문의 전화는 셔터를 내릴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끊이질 않았다.

"여보세요! 여긴 구인사절인데요. 전 000입니다. 얼마 전 제가 그곳에 정기예탁을 해놓은 돈이 있는데, 내가 몸이 안 좋아 못 가고 동료가 대신 가면 돈을 찾게 해줄 수 있나요?"라고 하는 상대방의 목소리에 짜증스럽기만 했던 내 표정이 확 바뀌어버렸다. 전화를 건 사람의 목소리는 나지막한 저음이면서도 상대를 빨아들일 만큼 애절함이 배어있었다.

목소리를 가늠해보면 스물네댓 살쯤 되었을 것 같은 젊은 남자 스님이었다. 아주 낮은 목소리라 잘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얼핏 들어도 아나운서나 성우처럼 근사한 목소리였다. 서너 번을 되물어서야 전화를 건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우리로선 본인이 아니면 누구에게도 그가 예탁한 예금을 돌려줄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손님이 맡긴 예금을 손님이 필요해서 찾게 해달라는 데도 절차가 있어 안 된다는 이유를 규정에 따라 몇 번을 설명하였지만, 예외를 적용해 달라며 애원하는 상대의 목소리는 너무도 절박하다 못해 처절하게 들렸다.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꼭 그 돈이 있어야만 먼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처럼, 수화기를 놓지 못하고 차근차근히 자신이 오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설명하는 스님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담당 부서의 과장님께 말씀드렸지만, 규정상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튿날도 스님으로부터 서너 번의 부탁 전화가 더 왔지만, 본인이 은행에 나오는 것은 무리라고 했다. 그 후 동료인 듯 보이는 젊은 스님 두 분이 도장과 통장을 가지고 와서 목소리의 주인공인 스님이 아주 많이 아파서 움직일 수가 없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아픈 사람이 왜 혼자 절에 가서 그렇게 힘겹게 사는 것인지. 젊은 사람이 속세를 떠나 출가를 했을 때는 분명히 이 세상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겪었기 때문일 텐데, 부모님을 일찍 여윈 안타까움 때문인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때문인지 목소리에 묻어 있는 눅진한 느낌 때문에 많이 궁금하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나만의 생각으로 그분에 대해서 단정 짓고 싶진 않았다.

며칠이 지나 여러가지 복잡한 본인확인 절차가 끝나고 동료 스님께 어렵사리 예탁금을 돌려주었지만, 내게 전화를 했었던 스님의 목소리는 잊히지가 않았다. 그리고 미비한 서류 문제로 내가 다시 그분이 머물던 절에 전화를 걸었을 때 이미 스님은 그 절에 있지 않았다.

사람의 목소리에도 제각각 주어진 색채가 있다는 것을, 목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의 모습이 그려진다는 것을 스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온종일 비가 내리고 나서 빗물이 고인 것처럼 눅진하고 축축한 목소리.

업무적으로 하루에도 수십 명이나 되는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접했지만 왜, 그분의 낮은 목소리는 유독 내 가슴속까지 스며들어 떠나질 않고 있었던 것인지. 그 스님이 누구인지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고, 이승에서 머물 시간이 얼마나 남은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전화로 전해오는 젊은 스님의 측은한 목소리만으로도 스님의 하얀 얼굴과 창백한 손가락을 그려보기에 충분했다.

스님의 그런 젖은 목소리는 결혼하고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도 내 가슴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10여 년 전 난, 다시 한 번 스님의 목소리와 닮은 목소리를 듣게 되었다. 간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다 마지막 가시던 그날, "미안하다. 어미야"라고 하시면서 들릴듯 말듯 간신히 말씀하시던 시아버님. 그 꺼져가는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와 닮았다고 생각했을 때 아버님은 이미 먼 길을 떠나신 후였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히고 만나는 인연에 대해서 가끔 생각한다. 살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사람은 이미 영혼끼리 약속을 한 상태에서 만나진다는데, 그렇다면 부부의 연을 맺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정말 서로에게 어떤 역할을 하기로 하고 만나지는 것일까? 비록 얼굴은 모르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을 내 가슴속에서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렸던 젊은 스님의 목소리를 생각하면, 전생에서 오백번을 채우지 못한 부딪힘 때문에 그렇게 목소리로만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오늘같이 하늘이 낮게 내려와 있고 저음의 첼로 음이 어울릴 것 같은 날에는 또다시 스님의 낮은 목소리가 생각난다.

▶2000년 월간문학세계 수필 신인상으로 등단
▶2010년 제5회 올해의 여성문학상 수상 등
▶저서 '나와 너의 울림'
▶충북여성문인협회, 충북수필문학회, 한국산문작가협회 회원, 한국작가회의충북지회 사무국장
▶1인1책 펴내기 지도강사
▶essay0228@hanmail.net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