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구 음악칼럼리스트

라흐마니노프는 스물네 살 때 교향곡 1번을 작곡한 후 평론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자 깊은 슬럼프에 빠졌다.

그리고 10년 만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 만든 곡이 교향곡 2번이다.

45세 이후부터 25년간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러시아와 러시아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작곡한 음악들이 외로움을 표현하듯 애절하다.

슬플 때 그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금방 눈시울을 적시게 만드는 센티멘털리즘과 우수에 가득찬 정서 때문에 그의 음악은 여성들이 특히 좋아한다.

피아노협주곡 2번의 2악장은 '에릭카멘' 이 부른 팝송 'All By Myself' 이란 곡으로 편곡될 정도다.

또 교향곡 2번의 3악장은 마치 어느 멜로 영화를 위해 쓴 음악 같다. 꿈결같이 아름다운 선율은 마치 어딘가에 두고 온 것들에 대한 애틋함마저 들게 한다. 20세기 최후의 낭만주의자라 불리는 그의 음악적 삶을 들여다본다.

라흐마니노프는 서구적 음악을 지향한 차이코프스키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는 1873년 러시아의 노보고로드 근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퇴역 육군 장교 출신이고 어머니는 장군의 딸이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9살 때 아버지가 무리한 투자로 재산을 탕진해 페테르부르크로 이사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어머니는 그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피아니스트인 '니콜라이 즈베레프' 의 집으로 보내 피아노를 가르쳤다.

열네 살 땐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 사촌형이기도 한 '알렉산더 실로티' 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배우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졸업식 땐 최고의 상인 금메달을 받았다. 이때 작품은 1막짜리 오페라 '알레코'였다.

당시 차이코프스키도 이 작품을 보고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그 후 함께 공연을 다니면서 가깝게 지냈다.

24세땐 자신의 역량을 인정받으려고 교향곡을 1번을 작곡했지만 비평가들로부터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큰 상처를 받았다. 그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갑작스런 발작을 일으켜 졸도라도 한 것처럼 멍한 나날을 보냈다" 고 표현했다. 이때 사랑도 실패했다.

그 후 창작활동에 완전히 의욕을 상실한 그는 작곡을 접고 피아니스트로 방향을 바꾸었다.

피아노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2년 만에 다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또다시 창작의 욕구를 느꼈지만 실패에 대한 충격 때문에 작곡에 대해 두려움이 많았다.

그는 자신감을 회복하기 위해 결국 최면요법의 권위자인 '니콜라이 달' 박사를 찾아가 중점적으로 치료를 받고난 후 실패의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 만든 곡이 그 유명한 '피아노협주곡 2번'이다. 1901년에 완공한 이곡은 러시아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고 러시아 최고의 작곡가에 주는 '글린카 상'도 받았다. 혁명이 일어났던 1905년엔 이 무렵에 사촌인 '나탈리아 사티나'과 결혼했고 볼쇼이극장 지휘자가 되면서 재기에 완전히 성공했다.

피아노협주곡 2번을 성공했지만 여전히 교향곡 작곡은 꺼렸다. 그러던 중 러시아의 정세가 더욱 불안해지자 독일로 거처를 옮긴 후 다시 창작활동을 시작, 마침내 2번 교향곡을 만들었다.

이곡은 1908년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됐다. 자신이 직접지휘로 초연한 이곡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1년뒤 미국순회 공연 후 최고의 명성을 얻어 보스턴 심포니 종신지휘자의 제의도 받았지만 거절했다.

1910년 러시아로 다시 돌아와 제2의 창작활동을 하면서 합창교향곡 '종'을 작곡했다. 그리고 1917년 혁명이 거세지자 또다시 가족과 함께 미국 망명길에 올랐다.

1931년엔 공식적으로 소련체제를 반대하자 소련정부는 즉각 보복조치 했다. 그 조치는 앞으로 소련 내에서 모든 연주를 금지한다는 것.

결국 그는 1935년에 미국시민을 선택했고 미국서 70세의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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