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희 전 언론인

우리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온갖 맛을 보고, 맛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음식을 먹으면서는 짜고, 달고, 쓰고, 신 맛을 느낀다. 미각의 기본이다. 또 어떤 음식물을 살 때는 맛을 보고 산다. 이 뿐만이 아니다. 어떤 일에 대한 재미 또는 만족감을 맛으로 말한다. 또 어떤 일을 겪음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는 느낌이나 기분 또는 분위기 따위도 맛으로 표현 한다. '살림 맛'이나 '패배의 쓰디쓴 맛' 또는 '시골의 구수한 맛' '따끔한 맛'등의 표현이 그렇다.

계절에도 각 각의 맛이 있다. 계절의 혀는 말한다. 겨울은 추워야 맛이고, 여름은 더워야 맛이라고. 또 봄은 화사하고 가을은 조금 쓸쓸하기도 해야 제 맛이라고 한다.

지난겨울은 한파에 폭설로 길고 힘든 나날이었다. 여기에다 구제역이란 놈까지 가세하여 더 더욱 고난의 겨울이었기에 짜고 쓰고 신 맛뿐이었다. 그러나 겨울은 혹독하고 추워야 제 맛이라면, 지난겨울은 제 맛을 톡톡히 한 셈이다.

사막의 한 가운데에 펌프가 있다. 모래땅 속 수 백 미터에 있는 지하수에 박혀 있는 펌프다. 펌프 옆에는 물 한통이 놓여 있다. 물통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한다. '이 마중물을 이용한 후에는 물통에 또다시 마중물을 꼭 채워 놓으세요. 다음 사람을 위해서.' 라고. 마중물이 있어야 사막 한 가운데서 캐러밴들이 생명수를 끌어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제 맛을 톡톡히 한 겨우내 꽁꽁 언 땅속에서 새 생명의 새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계절의 펌프에 마중물을 부어야 한다. 계절의 생명수를 끌어올린다. 봄 마중물이다. 겨우내 짜고 쓰고 신 맛에 지쳤던 계절의 혀가 이제 단맛을 느낀다. 계절의 혀가 단맛을 느끼기 시작하면 봄이다. 봄. 대지에 생명의 근원인 물이 오르면서 자연엔 생기가 돈다.

겨우내 칼바람이 몰아쳤던 계곡의 물이 녹아 내린지는 벌써, 봄의 마중물이 되어 꽁꽁 얼었던 땅 속으로 스며들었다. 깊은 잠에 빠졌던 나무의 뿌리들도 기지개를 켠다. 뿌리를 베고 긴 겨울잠을 자던 애벌레들도 깨어나고, 들꽃들의 씨앗도 숨쉬기 시작한다. 마중물의 단맛을 느꼈기 때문이다.

땅 위에서도 달콤한 봄맛이 여기저기에서 풍긴다. 밭이랑 넘어 오는 봄의 전령을 맞기 위해 들녘도 몸단장하기에 바쁘다. 파릇파릇한 새싹이 아무 탈 없이 돋아날 수 있도록 흙들은 굳었던 몸을 서로가 풀어주고 있다. 도심속의 가로수들도 새순을 위해 묵은 가지를 떨쳐낸다.

봄은 옷 입고 치장한 여인이라고 했던가. 도심속 여인들의 옷자락도 벌써 봄 곁으로 다가왔다. 먼지 가득했던 상가들의 간판도 겨울을 털어내고 단장을 한다.

'봄. 길고 음침한 겨울이 가고 어디선가 한 마디 노고지리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면, 이 땅에는 홀연히 봄이 이른다. 이 땅에 이르는 봄에는 준비 기간이 없다. 길고 음침한 겨울, 그리고 어둡고 쓸쓸한 겨울에 잠겨서 긴 담뱃대를 벗삼아 시민들은 모두 안일의 꿈에 잠겨 있을 동안, 성 밖에서 들여오는 소식에 교외의 나뭇가지 윤기가 돌기 시작한다는 기별이 들리는 듯하며 이 땅에는 홀연히 봄이 이르는 것이다.' <金東仁/ 雲峴宮의 봄>

정말로 어둡고 긴 음침했던 겨울을 힘겹게 이겨낸 송아지가 농부와 함께 들녘으로 나와 새봄을 노래한다. '음메∼, 음메∼'. 이제 들녘 곳곳에서 봄노래가 들릴 것이다. 봄아지랭이, 봄비, 봄나물, 봄나비, 봄밤, 봄하늘, 봄나들이, 봄노래, 봄잔치, 봄처녀, 봄맞이 등등. 화사한 봄의 향기와 함께 새롭고 신선한 봄 맛이 정말 맛있지 않은가.

새봄엔 어린아이들도 엄마 손을 놓고 소꿉동무들의 고사리 손을 찾아 집밖으로 나간다. 새내기들도 캠퍼스의 봄 향기에 녹아든다. 겨울의 끝자락에 산과 들, 그리고 동네의 응달진 구석구석까지 흠뻑 적신 봄 마중물에 시샘하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봄은 어느새 우리곁으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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