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읽기- 조승희 전 언론인

걸인이 있었다. 그는 다리 밑에 거적을 치고 살았다.

한 목구멍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던 때. 그 시절에 마을을 돌며 동냥을 했다. 죽지 못해 사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속은 따뜻했다. 그리고 봄 날씨처럼 포근했다. 사람 향기가 배어 있었다. 동냥을 하면서도 나 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걸인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시대의 고통을 온몸으로 부대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몸과 정신이 성할 수가 없었다. 험난한 세월은 야속했다. 아니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징용이란 단어 속에서 인간의 삶은 황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어느 날 걸인과 신부가 만났다. 그날도 걸인은 동냥을 하고 무극성당 앞을 지나갔다. 그때 오웅진 무극성당 주임신부가 그를 봤다. 1976년 9월 12일이다. 오 신부는 성당 앞을 지나던 걸인의 뒤를 따라갔다.

걸인은 동냥을 한 찬밥깡통을 들고 힘겹게 산을 올랐다. 그가 간 곳은 무극성당 뒤 용담산기슭의 움막이었다. 그곳엔 동냥조차 할 수 없었던, 또 다른 걸인들이 있었다.

걸인은 이들과 함께 찬밥 한 수저에 짠지 한 조각씩을 나누었다. 걸인은 나눔과 베품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실천했다. 걸인은 걸인이 아니었다.

금(金)이 많이 났었다는 음성군 금왕읍. 옛 지명이 무극이다. 무극의 부잣집 최씨 집안에 어느날 아들이 태어났다.

마을사람들은 부잣집 귀한 아들이라며 귀동이라 불렀다.

청년 최귀동은 가정도 꾸렸다. 부러울 것 없었던 생활도 잠시. 일제의 징용이란 쇠사슬에 북해도로 끌려 갔다. 그 끝이 걸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용담산기슭의 움막에서 얻어 온 찬밥을 먹여주는 걸인 할아버지의 모습을 본 오웅진 신부. 그날 밤 기도를 통해 깨달았다고 했다.

"얻어먹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주님의 은총"이란 것을. 오 신부는 다음날 주머니 돈 1300원을 몽땅 털어 시멘트를 샀다. 그리고 성당신자들의 자원봉사로 시멘트 블록을 찍었다.

1천300원의 종자돈으로 움막자리에 방5개의 '사랑의 집'을 짓고 걸인 18명을 맞아들였다.

사랑의 집 앞 작은 텃밭엔 멍들고 헐벗은 씨앗들이 날아와 싹을 틔우기 시작 했다. 허리가 굽은 할미꽃, 잡초 속에서 힘겹게 자라다 비바람에 찢기고 할퀸 온갖 들꽃들이 모였다. 그리고 질경이까지.

작은 텃밭에서 자란 이같은 꽃들이 꽃동네를 이루었다. 꽃동네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한 때는 음성의 자랑이기도 했다.'한 사람도 버려지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꽃동네는 사랑과 봉사의 손길로 따뜻하고 포근했다. 조금씩만 나누어도 충분했다.

오 신부와 최귀동 할아버지의 품속에서 꽃동네 작은 텃밭의 꽃들이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꽃동네는 행복했다. 꽃동네의 행복은 호사가 아니었다.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생활환경을 이룬 아주 작은 복지였다. 꽃동네의 작은 복지는 참 아름다웠다.

복지는 곳간에서 나온다. 따라서 작은 복지는 지방의 작은 곳간에서도 충분했다.

음성 꽃동네는 이제 꽃 대궐이 되었다. 노인요양원, 노인전문요양원, 천사의 집 등 7개 시설에 입소자만 2천53명에 이른다. 이중 81%인 1천659명은 충북이 아닌 타지역 출신들이다.

이제 꽃동네는 '동네 복지'가 아니다. 꽃 대궐로 살림 규모가 커진 '국가 복지'로 올라섰다.

그동안 충북도와 음성군은 꽃동네의 작은 복지를 위해 어려움 속에서도 작은 곳간을 헐어 왔다.

그러나 충북도와 음성군의 곳간 형편으로는 더 이상 꽃동네의 큰 복지를 부담 하기에는 너무 어렵다. 음성 꽃동네는 이제 특별사회복지시설 규모이다. 이같은 꽃동네의 복지는 이제 충북도와 음성군의 지방재정이 부담할 규모의 복지가 아니다. 정부에서 책임져야 한다.

국가 복지는 나라의 큰 곳간에서 나와야 한다. 정부는 충북도 등 지방의 재정형편을 고려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요즘 우리사회에선 복지가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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