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신영우 충북대 사학과 교수

충주읍성이 되살아나고 있다. 조선왕조에서 충청도의 최대 군현이 충주였다. 국왕의 정무 참고서인 '만기요람'에는 '충주의 중요성은 서울과 동등'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기록했다.

"서울은 한강 때문에 튼튼하다고 하지만 만일 충주가 패하게 된다면 적병이 상류에서 내리밀기 때문에 지붕 위에서 물병을 거꾸로 쏟듯 하여 막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외적 침범에 대비해 견고한 읍성을 쌓았다.

읍성은 외세 침략을 막아내는 국방 의지의 표상이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전국의 읍성을 철거하는데 이때 충주 읍성도 사라졌다.

성벽 자리에 도로를 만들었고 석재는 하천 정비용 등으로 사용되었다. 읍성이 사라진 후 충주는 고성의 정취를 잃게 되었다.

오늘날 충주는 대읍의 위상을 찾을 수 없다. 남한강 수로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신도시들의 발전에 밀려 정체된 도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럽의 고성이나 중국의 고성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찾을 수 없다.

◆ '2012년 충북 민속문화의 해'를 맞아 디지털 복원 추진

지금 와서 읍성을 실물로 복원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도시 중심부에 성벽을 쌓고 건물을 세우려면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다.

전통사회의 위상에 자부심을 갖는 충주에서 이런 귀중한 문화유산을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영화 아바타처럼 가상세계에서 디지털로 복원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2012년 충북 민속문화의 해'를 맞아 지금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에서 수행하고 있다.

디지털 복원은 "컴퓨터그래픽과 3차원 공간의 가상현실, 그리고 홀로그램 등으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미디어를 동원해서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컴퓨터로 만든 가상형체를 사람이 보고 체험하는 환경 속에 넣어주는 것이다. 충주읍성과 같은 커다란 생활민속 공간은 이런 방식으로 재현할 수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 작성한 토지대장인 광무양안(光武量案)에는 읍성 규모와 관아건물 규모를 상세히 기재하였다.

객사, 사령청과 같은 관청 외에 갑오개혁 이후 신설된 관청도 나온다. 신식교육을 시작한 소학교, 우두를 접종하던 종계소(種繼所), 조세 금납제를 시행하며 설치한 세무청, 경찰제 실시 후 만든 경무청, 근대 우편사업을 시작한 우체사도 나온다.

◆ 복원된 충주 읍성은 중요한 관광과 교육 자원

디지털 복원 과정은 복잡하다. 먼저 광무양안 기록을 분석해서 대지와 기와집 초가집 그리고 논밭을 파악한다.

그런 다음 지도 위에 하나하나 필지별로 배치해서 위치를 확정하는데 이런 작업은 국내 최초로 하는 정밀작업이다.

각종 건물은 사진을 수집해서 이를 토대로 3D 영상모형으로 제작한다.

기둥, 창문, 지붕, 담장 등은 사진 그대로 복원하고, 사진이 없으면 비슷한 자료를 찾아 재현한다. 길과 하천 폭은 상상력으로 만들어야 한다.

가상세계에서 완성된 충주 읍성은 네비게이션처럼 볼 수 있다. 성문으로 들어가서 관아지역을 거쳐서 거리를 둘러보고 읍내 전체를 조망하게 된다. 현재의 충주 도심과 100년 전의 충주를 비교하는 재미있는 시간여행이다.

세계에는 뛰어난 디지털 복원 작품들이 있다. 영국박물관에서는 파르테논 신전을 복원했고, 스탠포드대학은 미켈란젤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국내에서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를 디지털로 복원한 바 있다. 국내에서도 여러 지역에서 문화원형 제작에 관심을 가져왔다.

하지만 그중에는 정밀성이 떨어지거나 상상만으로 재현한 것들이 많다.

충주읍성 디지털 복원은 늦었지만 사업방향이 좋다. 광무양안이라는 단단한 기초자료 위에 재현한 3D 영상은 감흥이 다를 것이다.

정밀한 3D 영상을 충주박물관에서 커다란 화면으로 본다고 상상해보자. 충주를 알리는 관광 자원으로서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우리 고장의 역사를 공부하는 학교교육에도 이만큼 좋은 교재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shinyong@chungb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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