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장부 일주일새 정리 예약 없어 문 닫는 집도

"점심시간이면 적어도 40∼50명씩은 손님을 받았는데 외상값 파동 이후 단골 공무원 구경하기가 힘들어요."

9일 오후 4시 충북도청 정문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식당. 칼국수를 주 메뉴로 하는 이 식당의 종업원 A씨는 텅빈 수첩 하나를 보여줬다.

이날 점심 매상 장부다. 도청 수질관리과, 송무팀, 균형개발과 직원들의 식사로 칼국수 5그릇, 콩나물밥 4그릇, 떡만두 12그릇을 팔았다. 평소 절반 수준이다.

도청과 가깝기도 하고 넉살좋은 주인 인심 덕에 늘 북적거리던 이곳도 외상값 파동을 견뎌내지 못했다.

이날 계산은 외상이 아닌 즉시 결제. 지난 7일 도 감사관실에서 외상 밥을 먹지 말라는 엄포가 있은 이후 이 집에서도 도청공무원들의 외상장부가 사라졌다.

"외상값 문제가 커지면서 도청 공무원들이 너나 할 것없이 밀린 외상값을 다 지불했어요. 그 이후로는 찾는 발길이 뚝 끊기다시피했죠."



연말이면 실과별 저녁 예약으로 빼곡히 적혀있던 달력도 이제는 듬성듬성 하다. '도의회 모임', '상고모임' 등이 적혀있지만 가장 바빠야 할 16일 이후론 저녁 예약이 하나도 없다. A씨는 "올 들어 손님이 자꾸줄어 걱정이었는데, 외상값 파동이후 공무원 손님이 도통 보이질 않는다. 사장님은 '장사가 안돼서 머리가 아프다'는 푸념을 요즘들어 자주한다"고 말했다. 보통 오후 10시까지 칼국수를 말거나 저녁밥을 짓던 손길도 오후 8시면 끝난다고 했다. 금요일인 이날 잘나가던 칼국수집의 저녁 예약은 없었다.

10m정도 떨어진 복 전문점. 저녁에 붐벼야 할 식당은 이미 문을 닫았다. 인근 상가주민은 며칠전부터 일찌감치 문 닫는 일이 잦아졌다고 했다. 일주일새 3일정도만 문을 열어놨다는 말도 전했다.

염소탕을 전문으로 하는 인근 식당 상황은 더 심각했다. 이곳 사장인 B씨는 이날 염소탕 4그릇을 팔았다고 했다. 그는 "보통은 40명씩 왔었는데, 이게 뭐냐? 파리만 날린다"며 화가 난 듯 말했다. 12월들어 매상이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며 주변 상가들도 모두 마찬가지 상황에 직면했을 것이라는 말도 전했다.

B씨는 "외상값을 즉시 결제하겠다는 공무원들의 전화를 최근 자주 받았다. 한 번은 쓰레기통을 뒤져서까지 외상목록을 찾아줬다"고 말했다. 외상목록이 밖으로 새 나가면 불이익을 받지않을까 하는 공무원들이 서둘러 장부를 없앴다는 것이다. 외상장부가 없어지는 것을 우려하는 의견도 제시했다. 그는 "외상장부는 도청 직원들과 거래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 될 수도 있는데, 그게 없어지면서 단체 손님 받기가 사실상 어려워 졌다"고 말했다.

근처 생태찌개 전문점도 한가하긴 마찬가지. 이 집 사장 C씨는 "29년동안 공무원들을 상대로 밥집을 하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했다. 점심 때는 방이 없어서 손님을 못 받을 정도였는데 외상값 파동이후로 완전히 죽을 지경이라는 것이다. 이 날은 3팀(13명)을 받았다고 했다. 12개 남짓의 테이블을 고려하면 평소 4분의 1수준도 못채우고 점심시간을 보냈다는 뜻이다. C씨는 "밥 장사해서 사실 남는 것도 없는데 생각지도 못한 된서리를 맞은 기분"이라며 "도청 주변은 일반인들이 잘 오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오지 않으면 영업이 어렵다"고 했다. 그는 도청 직원들과 주변 음식점과의 관계를 '공생관계'로 설명했다.

생태·동태찌게, 칼국수, 매생이, 청국장 등 도청 주변 식당들 메뉴를 뜯어보면 도청직원들을 염두에 두고 하나같이 중복을 피하기도 했다.

C씨는 "연말이면 최고 잔치가 되어야 하는데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지게 생겼다"며 "주머니 털어 외상값을 갚더니 잘 오지 않는다. 제발 외상값 문제가 일시적인 한파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기자가 '외상 밥을 먹지 말라는 도청 내부 지시가 있었다'는 말을 전하자 그는 깊은 한숨을 쉬며 조리실로 들어갔다.

한편 이날 도청 구내식당은 12시부터 몰려든 직원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 최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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