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정문섭 〈논설위원〉

희랍신화를 보면 그리스 최고의 신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를 불러 여자인간을 만들라고 명령한다. 인류 최초의 여성 '판도라(Pandora)'의 탄생 배경이다.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상자를 주면서 절대 열어보지 말라고 한다. 판도라는 신 프로메테우스의 동생과 결혼하여 한동안 행복하게 산다. 그러나 판도라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결국 상자를 연다. 그 순간 안에 있던 것들이 순식간에 밖으로 빠져나왔다. 다급하게 상자를 닫았지만 이미 인간의 마음과 몸을 해치는 욕심, 시기, 질투, 원한, 복수, 질병 등 죄악과 재앙들은 이미 밖으로 새어나온 뒤였다.

고승덕 국회의원이 정치권의 판도라 상자를 열었다. 정치권의 구린내와 악취 등 온갖 비리들이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돈 봉투를 돌린 당사자로 지목받았던 박희태 국회의장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밝혔지만 고 의원은 "자신에게 배달된 3백만 원이 든 노란봉투는 한 두 개가 아니었다."고 진술하면서 파동은 정치권 전체로 번지고 있다.

고 의원은 하필 왜 이 시기를 택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까.

스물세 살의 나이인 1980년 행시에 합격하며 고시 3관왕이 되었던 공부의 신 고승덕 의원.

그는 하버드·예일대 로스쿨을 다녔고, 정치권에 들어서기 전에는 방송인과 펀드 매니저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다. 변호사 시절 그의 저서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이란 없다'를 주제로 전국 순회강연을 다니면서 많은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그는 지난 10일 기자회견에서 "비상대책위원회가 출범하기 직전 재창당 방식을 놓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는데 재창당을 하면 전당대회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돈 봉투가 다시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고 밝혔다.

한국정치도 이번 기회를 통해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물론 판도라 상자를 연 그의 의도를 불순하게 보는 시각도 있다. 자신의 지역구에 박희태 의장의 먼 친척이자 고향 후배인 전직 구청장이 출마하려 하자 이를 폭로했다는 주장이다.

그의 정확한 속내는 누구도 알 길이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전당대회장에서 돈 봉투가 오가는 관행은 정치권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며, 그 때 검은 돈들이 오고간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그동안 모든 분야에서 변화와 혁신의 바람이 불었지만 유독 정치 분야는 후진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1995년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은 이런 정치권을 겨냥해 '기업은 2류, 관료와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고 비판했다가 YS의 눈 밖에 나서 한동안 고생했다는 후문도 나돌았었다.

그렇다면 일류는 무엇일까. 당연히 국민이다. 사실 한국인처럼 머리 좋고, 판단력이 빠르고, 부지런하고, 적응능력이 뛰어난 집단은 전 세계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정치가 흔들리면 지금처럼 나라 전체가 흔들린다.

역사 속에서도 성군이 나오면 나라는 태평성대였지만 폭군이 나오면 나라 전체는 비상시국으로 변했다.

지금의 대통령은 더 이상 군왕일 수 없다. 그저 국민의 부름을 받아 잠시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자리일 뿐, 권력의 화신이 되어서는 안 되는 자리이다.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모든 악과 재앙은 다 빠져나왔어도 급히 닫는 바람에 희망은 남겼다고 그리스 신화는 전한다. 정치권의 판도라 상자도 밖으로 나온 악과 재앙만 잘 정리하면 우리도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 기회에 금권정치 관행도 바로 잡고 새 정치인들이 대거 나서서 새 술을 새 부대에 담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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