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교수의 이순신처럼 일하라] 제1장 박제화된 영웅 이순신을 다시 불러내다 ⑤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정사(正史)는 그의 죽음을 전사(戰死)로 규정했다. 일부 사람들은 "이순신이 자살했다.", "이순신이 도피한 후, 은둔생활을 하다가 천수(天壽)를 다하고 죽었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죽음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한, 누구든지 잘못을 논(論)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의 죽음에 대한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신중한 접근 자세가 요구된다.

역사는 사료(史料)들의 결집체다. 그러나 역사 속에는 사료들이 침묵하는 크레바스지역(crevasse area)이 꽤 많이 존재한다. 그 지역을 안전하게 통과하려면 역사적 상상력, 추리력, 스토리텔링 능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제 그것을 활용해서 이순신의 죽음 문제를 새롭게 조명해보자. 그의 죽음에 대해 지금까지 제기된 이견(異見)은 크게 3가지다.

첫째, 이순신이 의병장 김덕령의 억울한 죽음을 본 후, 자신도 그와 비슷한 운명에 처해질 것을 우려한 나머지 자살을 선택했다는 주장이다. 거기에는 '이순신이 노량해전에 나갈 때, 융복만 입고 나갔다.', '이순신이 근접전을 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일부러 왜군 전함에 가까이 다가갔다.'는 얘기들이 반드시 합세한다.

둘째,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도피한 다음, 은둔생활을 하다가 고종명(考終命)을 했다는 주장이다.

셋째, 이순신이 자신의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마지막 순간까지 왜적 섬멸을 위해 멸사봉공(滅私奉公)하다가 적탄(敵彈)을 맞고 전사했다는 주장이다.

이들 가운데 어느 것이 진실일까? 또 그 근거는 무엇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순신의 죽음을 올바로 규명하기 위해서는 노량해전을 앞두고 그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노량해전에 임하는 이순신의 마음을 정확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결심을 낳고, 그 결심이 행동을 지배한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지 않더라도 이와 같은 배경지식의 습득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노량해전을 목전에 둔 이순신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앞두고 많은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1592년 5월 29일의 사천해전에서 적탄이 왼쪽 어깨를 관통하는 큰 부상을 입었다. 그는 같은 날 ≪난중일기≫에다 '...(중략) 군관 나대용이 총에 맞았으며 나도 왼쪽 어깨 위에 적탄을 맞았다. 적탄이 등을 뚫고 나갔으나 중상은 아니었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그는 사천해전에서 입은 총상(銃傷) 때문에 숨을 거둘 때까지 큰 고통을 겪었다. 그는 ≪난중일기≫에다 자신의 상처에 대한 심경(心境)을 기록했다. '적탄을 맞은 자리가 중태다. 그런데도 매일 갑옷을 입고 싸워야 하므로 상처가 곪아터져 악즙이 흘러내리니 옷을 입을 수가 없다. 밤낮으로 뽕나무를 태운 잿물과 바닷물로 상처를 씻으나 별로 차도가 없다.'

부하 장수들과의 잇따른 작전회의나 활쏘기를 마친 후에 가졌던 잦은 술자리 회식, 선조와 조정 대신, 그리고 원균과의 끊임없는 불화와 상호불신에 따른 고뇌와 번민, 전쟁 스트레스, 1597년 3월 의금부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도 그의 육신을 위협했다.

또한 백의종군을 하던 중에 맞이한 어머니 초계 변씨의 죽음과 셋째 아들 면의 전사도 그의 순진무구한 영혼을 지치고 힘들게 했다. 해전과 전장(戰場)의 속성에 문외한인 선조와 조정 대신들의 무리한 출전 요구, 자신의 절대 후원자였던 영의정 유성룡에 대한 탄핵 움직임도 그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그는 이 모든 아픔과 시련이 왜적의 침략에서 연유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온갖 못된 짓을 자행하던 왜적들이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을 계기로 무사하게 철군(撤軍)하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더구나 왜적들은 자신의 어머니와 아들의 목숨까지 앗아간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철천지 원수였다.

마침내 그의 의리사관(義理史觀)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남은 것은 노량앞바다에서 왜적과 왜군 전함을 모조리 쳐부수는 것이었다. 그것은 1598년 11월 19일 새벽에 했던 그의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餘恨)이 없겠습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노량해전에 걸겠다는 무서운 각오다. 그는 함대를 노량 앞바다로 출동시킨 후, 건곤일척(乾坤一擲)의 혈전(血戰)을 벌이다가 안타깝게 적탄을 맞고 숨을 거뒀다. 역사가 그의 죽음을 '전사'로 기록한 것은 3가지 이유에서다.

#이순신의 죽음을 전사(戰死)로 간주하는 3가지 근거

이순신의 유언이 첫 번째 근거다. 그는 충남 공주 출신의 남해현감 유형에게 유언을 남겼다. "자고로 대장이라는 자가 전공을 인정받고자 한다면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 따라서 나는 왜적이 퇴각하는 날에 죽어 나중에 유감될 일을 없애겠다." 유형의 행장(行狀)에 나오는 이 얘기는 이순신이 죽음을 스스로 선택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의 유언에 들어 있는 '죽어', '유감'과 같은 다소 애매모호한 표현 때문에 자살설과 도피 은둔후 고종명(考終命)설과 같은 다양한 추측들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유언의 진가(眞價)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왜적을 제물로 삼겠다.'는 굳은 의지를 밝힌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을 돌보지 않고 독전(督戰)을 하다가 적탄을 맞았다. 적탄은 그의 가슴을 관통했다. 그런 사람에게 자살설, 고종명(考終命)설은 어불성설이다.

이순신의 고종명(考終命)설은 설득력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 두 번째 근거다. ≪난중일기≫에서 발견되는 그 특유의 사생관(死生觀), 의리사관, 언행 등을 종합해볼 때, 더 더욱 그렇다. 그는 생리적으로 부인의 치마폭에서 편안하게 숨을 거둘 사람이 못되었다.

20대 시절, 그는 무과시험을 목전에 두고 지인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대장부가 세상에 나와 나랏일에 쓰여지면 죽기로써 일할 것이고, 쓰이지 못한다면 들녘에 나가 농사짓는 것으로 만족할 일이다. 권세에 아첨해서 한때의 영화를 추구하는 것은 내가 제일로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또 13척의 판옥선으로 130여척의 왜군 전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던 명량해전은 그에게도 공포의 해전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엄습하는 공포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의 무서운 정신력으로 극복한 후, 해전 승리를 일궈냈다. 그런 사람에게 비겁자의 대명사인 고종명이란 단어를 덧붙이려는 것은 참으로 악의적인 고약한 처사다. 적어도 이순신한테서 비겁한 도망자나 은둔자의 DNA를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세 번째 근거는 이민서나 조경남 등이 제기한 자살설이 충분한 현실 설명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숙종 때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한 이민서(1633~1688년)는 이순신의 자살설을 제기했다. 그는 "....(중략)...의병장 김덕령이 억울하게 옥사를 당하자 여러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홍의장군 곽재우는 군직(軍職)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 당화(黨禍)를 피했고, 이순신도 갑옷과 투구를 벗고 노량해전에 나가 싸우다가 적탄을 맞고 죽었다."라고 말했다.

또 이순신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경남(1570~1641년)은 ≪난중잡록≫에다 '이순신이 융복만 입은 채, 조선 수군의 선두에 서서 직접 북채를 들고 전투를 독려하다가 적탄을 맞고 숨졌다.'고 기술했다.

두 사람이 주장하는 공통점은 '이순신이 살려고 마음만 먹었으면 충분히 살 수도 있었는데, 선조로부터 불명예스러운 참화를 당할까봐 두려워 스스로 죽었다.'는 것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주장 같지만, 정사(正史)의 기록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겁함과 그의 뚜렷한 사생관이 정면으로 가치충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순신의 죽음을 새롭게 규명해줄 결정적인 사료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그의 죽음은 전사로 간주하는 게 지적(知的)으로 정직한 자세다. 오늘도 그는 우리들에게 엄명한다. "더 이상 내 죽음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마라. 나는 남해바다 노량에서 전사했다!"



#김덕수 교수는

▶공주대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교수

▶청주고, 충북대 경제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석사· 경제학 박사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 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등 16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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