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수 교수의 이순신처럼 일하라] 제1장 박제화된 영웅 이순신을 다시 불러내다 ⑦

인간관계의 유형에는 크게 4가지가 있다. '너 죽고 나 죽기', '너 죽고 나 살기', '너 살고 나 죽기', '너 살고 나 살기'가 그것이다. 이들 가운데 이순신과 유성룡의 관계는 '너 살고 나 살기'의 전형(典型)일 것이다.

이순신과 유성룡의 출생지는 서로 다르다. 이순신은 1545년 서울에서, 유성룡은 1542년 외가인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이 어린 시절에 어떤 친분관계를 맺었고,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이긍익(1736~1806년)의 ≪연려실기술≫를 비롯한 일부 문헌만이 그들의 어릴 적 성향이나 인품을 말해주고 있을 뿐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순신은 어려서부터 담력이 컸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유난히도 능했다.'고 썼다. 유성룡이 단정(斷定)투로 말한 것은 그가 이순신을 매우 잘 알고 있음을 시사한다. 유성룡은 이순신의 둘째 형 이요신과 친구지간이었다. 따라서 유성룡과 이순신은 서울의 같은 동네에서 형님과 동생 사이로 친하게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어릴 적 집안 형편은 아무래도 유성룡이 이순신보다 나았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유성룡의 아버지 유중영은 황해도 관찰사(현 도지사)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반해,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아무런 관직을 맡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이순신은 부친 이정이 식구들을 데리고 자신의 처갓집 동네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를 오면서 유성룡과 헤어지게 되었다. 유성룡은 문과 급제를 목표로 과거준비를 시작했고, 이순신 역시 아산 생활에 적응하면서 결혼도 하고 장인 방진의 권유로 무과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

따라서 두 사람은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 기간 동안 두 사람이 어떻게 우정을 나누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안부편지를 주고받거나 이순신이 상경(上京)할 일이 있는 경우 유성룡을 찾아가서 만났을 것 같다.



# 유성룡이 이순신의 구원투수를 자청하다!

유성룡은 22세 때 사마시를 합격하고 24세 때에는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순신도 32세에 식년무과에서 병과로 급제한 후, 전후방의 오지를 돌면서 무관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도움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은 유성룡이었다.

1586년 1월, 당시 예조판서였던 유성룡은 이순신을 위한 첫 번째 구원투수 역할을 자청했다. 즉 종6품 사복시 주부 이순신을 종4품 벼슬인 함경도 경흥고을 조산보 병마 만호(현 대대장)자리에 추천한 것이다. 그것은 1597년 1월 27일자 ≪선조실록≫에 나온다.

물론 유성룡이 개인적 친분만으로 이순신을 추천한 것은 아니다. 유성룡은 "순신은 성종 때 이거의 자손으로 신은 그가 능히 자기 직책을 감당할만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를 조산보 만호로 천거했던 것입니다."라고 추천 사유를 밝혔다. 이순신에 대한 유성룡의 후원과 관심은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조일전쟁의 전운(戰雲)이 감돌던 1591년 2월 13일, 유성룡은 이순신의 두 번째 구원투수로 나섰다. 종6품 정읍현감 이순신을 정3품 벼슬인 전라좌수사로 전격 발탁한 것이다.

이때 유성룡은 좌의정 겸 이조판서였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발탁은 한꺼번에 무려 6단계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인사였기 때문에 대간들의 반대가 무척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유성룡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조선 수군의 '별'이 될 수 있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관할구역인 5관(순천부, 낙안군, 보성군, 흥양현, 광양현) 5포(사도, 방답, 여도, 녹도, 발포)를 순시하면서 철저한 현장점검을 실시했다. 그는 예하 부대를 순시하면서 군기 강화와 무기점검, 성과 해자 보수, 연대(煙臺) 구축, 철쇄 설치 등을 지휘 감독했다. 그리고 판옥선 및 거북선 건조, 화약 제조, 군사훈련 강화 등을 통해 전라좌수군의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1592년 초, 유성룡은 인사차 자신을 찾아온 이순신 부하에게 개인적인 편지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라는 병서(兵書)를 선물했다. 이순신은 1592년 3월 5일자 ≪난중일기≫에다 그 병서(兵書)가 수륙전(水陸戰)과 화공전(火攻戰)의 전술을 설명해주는 매우 뛰어난 책이라고 극찬했다.

1592년 4월 13일 조일전쟁이 발발하자 유성룡은 좌의정에 병조판서와 도체찰사를 겸하며 모든 군무(軍務)와 행정을 총괄했다. 이순신 역시 전라좌수사로서 1592년 한해 동안 10전 10승을 기록하며 유성룡의 기대에 화려한 전공(戰功)으로 보답했다.

한편, 조일전쟁이 일어난 지 20일 만인 1592년 5월 3일 수도 한양이 왜군의 수중에 떨어졌고, 6월 15일에는 임시 수도였던 평양마저 함락되고 말았다. 심리적 패닉 상태에 빠진 선조는 안주, 영변, 박천, 정주, 선천, 용천을 거쳐 의주까지 도주한 다음, 명나라로 망명하려고 했다. 이때가 1592년 6월 23일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망명계획은 유성룡의 강력한 만류로 무산되었다. 이로 인해 선조는 유성룡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나약하고 자기 밖에 모르는 선조를 끝까지 보좌하면서 자신을 낮추는 유연한 사고와 겸손한 처세술로 국가비상사태를 극복하고자 노력했다. 선조도 그런 유성룡에게 미안한 생각을 가졌는지, 1593년 10월 27일 유성룡을 영의정에 재임명했다.

#1598년 11월 19일 아침, 구국의 두 별이 동시에 사라지다!

1593년 10월 6일 유성룡은 정예 직업군인을 양성하는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조선 조정에 등을 돌린 민초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대개혁을 단행했다. 이는 조선 개국 후 200년 동안 유지해 온 신분제 사회질서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첫째, 민초들의 세금부담을 크게 경감시켜 주는 조세 개혁을 추진했다. 기존의 공납(貢納)제도는 가호(家戶)단위로 부과되는 조세로서 민초의 고혈을 짜내는 역진세였다. 그는 땅의 소유면적에 따라 세금을 차등 부과했고, 세금 역시 쌀로 내도록 했다. 이것이 바로 대동법의 효시인 작미법(作米法)이다.

둘째, 병역의무는 민초들의 몫이었고 양반들은 제외되었다. 유성룡은 병역법 개정을 통해 양반들에게도 병역의무를 부과시켰다. 그런 다음, 양반과 민초들이 같은 부대에서 근무하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부대가 속오군(束伍軍)이다.

셋째, 천인(賤人)들도 전투에 참여해서 군공을 세우면 천인신분에서 구제해주는 면천법(免賤法)을 단행했다. 본래 천민은 양반의 사유물(私有物)이라는 이유에서 병역의무를 부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면천법이 알려지자 천인들 가운데 전투에 자진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이는 조선 군대의 전투력 향상으로 이어졌다.

민초들은 유성룡의 개혁조치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런 민초들의 지지가 조일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그러나 북인, 서인, 동인들의 생각은 민초들과 달랐다. 특히 이이첨을 비롯한 북인들의 눈에는 유성룡이 양반들의 기득권을 박탈하고, 신분제 사회질서를 파괴시킨 주범으로 비쳐졌던 것이다.

공익(公益)보다 사익(私益)을 우선시하는 사이비 선비들이 그런 정치적 틈새를 놓칠 리 만무했다. 그들은 '명나라의 과도관주사(科道官主事) 정응태의 무주(誣奏)사건'을 정치적 덫으로 활용했다. 즉 그 사건을 명나라에 해명하기 위한 사신으로 유성룡을 지목했는데, 그가 거절했다는 것을 빌미로 삼았다. 유성룡에 대한 그들의 탄핵상소는 집요했다. 선조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전란(戰亂)극복의 일등 공신인 유성룡을 영의정 자리에서 내쫓았다. 그때가 조일전쟁의 종전일인 1598년 11월 19일 아침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아침,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자신이 최후의 결전장소로 삼았던 노량 앞바다에서 왜적의 조총을 맞고 장렬하게 전사했다. 1597년 3월 초, 이순신이 한양으로 압송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될 무렵, 유성룡은 선조에게 사직서를 제출하며 이순신을 지켜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이 영의정에서 실각하는 바람에 이순신의 죽음을 막아주지 못했다. 약 6년 8개월 동안 왜적의 침략을 온몸으로 지켜냈던 구국의 별 두 개가 동시에 사라지자, 조선 조정은 갑자기 어둠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김덕수 교수는

▶공주대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교수

▶청주고, 충북대 경제학과 졸업, 고려대 대학원 석사· 경제학 박사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 '김덕수 교수의 경제 EQ 높이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등 16권 출간

키워드

#연재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