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카페>조춘희

1. 기울어진 계절을 애써 들춰 보는 밤, 모난 것들을 밤마다 버리고 둥글리면 차츰 완성을 향해 차오르고 하나가 기울면 다시 하나가 태어난다. 애당초 소멸이란 없었던 것, 하나는 불완전한 수많은 것들이 모여 줄기차게 밀어올린 푸른 목숨.

2. 시대적으로 침울하고 어둡던 시대에 태어났는데도 그 애의 얼굴은 늘 달덩이였다. 둥그런 얼굴에 살빛도 눈부시고 웃으면 눈부터 웃는 것이 영락없는 동산위에 보름달이었다. 보라, 둥근 것은 매듭이 없고 환하다.

3. 친구 중에 유독 엄마를 일찍 여윈 자야는 기댈 곳 없는 어린 마음이 항상 울먹해 있을 법도 한데 밝고 의젓한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에든지 그 친구를 앞장 세웠다. 멀지 않아 새엄마가 들어오고 살갗이 트고 얼룩져 유난히 검고 깡마른 계모는 손톱과 이가 누렇게 변색되도록 담배를 피워 물던 그 모습, 입술마저 까맣게 변하더니 사사건건 자야를 힘들게 했고 살림을 온통 어린 딸에게 떠 맡겼다.

4. 거기에다 새로 태어난 남동생 돌보랴 들에 밥 해 나르랴 어린 몸으로 감당키 어려운 일을 묵묵히 잘도 해냈다. 그런 믿음직스러운 친구의 말이라면 우리는 무조건 따랐고 특히 보름달이 뜨는 대보름날이면 그 애네 살구나무 밑에 모여앉아 꿀맛 같은 모의를 시작했다.



5.먹어도 금세 허기를 느끼던 그 시절엔 널따란 양푼에 밥을 실컷 퍼 담아 온갖 나물과 고추장 큰 술 하나 떠 넣고, 썩썩 비벼 배불리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여, 달빛 환한 보름날이면 옆에 큰 바가지 차고 집집마다 밥 훔치러 다니는 게 특별한 재미였다. 들켜도 서로 용납해 주던 그 시절, 누구네 집엔 고구마 넣고 구수하게 지은 좁쌀 밥이 남아있고 어느 집엔 푹 퍼진 보리밥 한 솥 한 것이 그냥 남아있다는 정보를 자야는 훤히 꿰뚫고 있었다.

6. 친구인데도 언니 같던 그 애는 어느 날 밥을 잔뜩 해서 부뚜막에 놓아두었으니 달이 구름에 가려 사위가 어두워지면 얼른 가져가라는 귀띰을 해 주었다. 순이, 옥이, 나는 서로 등 떠밀다가 할 수 없이 내가 잠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그 애 사립문 살구나무 앞까지 이르렀는데 아뿔싸, 호랑이 자야 새엄마가 마실갔다 들어오는 게 아닌가. 반사적으로 쿵, 살구나무 아래 배추밭으로 몸을 날렸다. 지옥으로 떨어질 때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억센 자야 엄마한테 들키면 죽음이라는 생각에 앞뒤 가릴 새도 없이 뛰어내린 것이다. 포만감에 젖어볼 행복은 그렇게 더디 오고 손에 닿을 듯 또 멀었다.

7. 간절함은 때로 균열을 만드는가. 다리뼈에 금이 갔는지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 한참을 속으로만 앓는 소리를 내며 어둠속에 납작 엎드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기다리다 정황을 눈치 챈 자야가 어둠속으로 손을 내밀어 나를 끌어올렸다. 그 다음 날 얼마나 놀랐느냐고 밥을 한 솥 해서 새엄마 몰래 둥근 대접에다 고봉으로 퍼 돌렸다. 절뚝거리던 다리도 친구의 푸짐한 정에 그만 씻은 듯 나아버렸다.

8.미국 조지아 주립대학 연구팀이 발표한 결과를 보면 보름엔 사람들이 허기를 더 느낀다고 했다. 성인 694명의 식사패턴을 연구한 결과 달의 주기에 따라 의미 있는 변화를 보였는데 초승달일 때 보다 보름달이 뜨는 시기에 식사량이 8%정도 증가했다는 보고를 했다. 달의 변화가 사람의 생활 패턴과 건강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 결과가 흥미롭다.

9. 또 영국 리즈대학 연구팀이 발표한 걸 보면 달은 질병을 악화 시키거나 완화 한다고 했다. 보름달이 뜰 무렵엔 병원의 진료예약 건수가 3.6% 증가하는 경향을 보였고, 통풍이 재발하거나 심장, 갑상선, 방광 질환이 발병하는 사례가 있었다. 여성의 배란, 유산 등 생식 계통도 달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소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비뇨기계 질병 환자는 초승달이 뜨는 시기에 증상이 완화되었다. 보름달이 뜨면 유난히 속이 허 하거나 출출했던 일, 공연히 눈물이 나고 마음이 시리던 일들이 이런 일련의 연구 결과와 무관하지 않은 것일까.

10. 누가 뭐래도 보름달이 우리에게 주는 정서는 평화롭고 넉넉한 마음이 아닐까 싶다. 세월의 바깥을 고요히 응시해보면 언제부턴가 우리 마음엔 달이 뜨지 않는다. 하나같이 앞만 보고 내달리고 땅만 보고 걷는다. 누가 뒤를 쫓아올까 두렵고 괜히 사방을 두리번거리게 된다. 비록 삭막한 세상이지만 그래도 가끔 밤하늘 한번 쳐다보며 달과 별에 눈 맞추고 가슴에 모난 것들을 하나씩 버리다 보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조금은 둥그러지지 않을까.

11. 급하고 숨차게 달려와 이젠 그만둬야지. 여기쯤에서 그만 쉬어야지 하면서도 마지막을 환하게 꽃피우고 싶은 그 소망 때문에 페달을 밟기만 한 속성에서 벗어나 강강수월래 강강수월래, 산다는 건 저리 환한 달빛 축제 같은 것이었다고 아파하는 삶을 한번쯤 쓰다듬어 줄 일이다. 이쯤에서 하늘 한 번 올려다보며 세상을 다 품어 안은 보름달 한번 꼭 안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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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수필집 '신들린 여자', 시집 '꿈꾸는 콩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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