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카페> 이 난 영

글씨는 그 사람의 성격을 나타내고 글씨체는 타고난다고 하는데 필체가 좋지 않은 나로서는 글씨 잘 쓰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인격까지 고매해 보여 무척 부럽다.

내가 어린 시절에는 남존여비사상이 뚜렷했었다. 특히 시골에서는 "먹고살기도 힘든데 여자들이 무슨 얼어죽을 학교냐"고 중학교 진학을 시키지 않았다. 그저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에서 밥이나 해먹다가 시집이나 가면 된다는 부정적인 생각들을 하였다.

그러나 학자 집안의 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젊어서 한학을 배우셨다. 그 덕에 여자는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당시의 어머니들 사고방식과는 전혀 다른 앞을 내다보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던 나는 집에서 5㎞나 떨어진 학교를 혼자 다닐 수가 없어 제 나이에 입학하지 못하고 동생과 함께 다니기 위해 또래 아이들보다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어머니는 학교 들어갈 나이에 건강상 집에 있는 것이 무척 안쓰러우셨는지 농사일이 바쁜데도 틈틈이 한글 읽는 법과 쓰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등잔불 밑에서 바느질을 하시다가도 내가 글씨를 빨리 쓰기 위해 아무렇게나 쓰면 정성 들여 또박또박 쓰라며 주의를 주시곤 했다.

그러면서 사람은 얼굴이 좀 못생겼어도 밝게 웃는 표정을 해야 복이 들어오고, 글씨는 잘못 쓰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정성 들여 또박또박 같은 글씨체로 써야 앞으로의 인생도 성실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을 되풀이 하셨다.



어린 마음이라 성실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그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쓰지 못하는 글씨를 또박또박 쓰기 위해 노력을 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지금은 유치원부터 한글을 다 배우고 입학을 하지만 그때만 해도 한글을 익히고 입학하는 어린이가 없었다. 한글을 익히고 초등학교 입학을 하였기 때문에 글씨체는 시원찮은데도 글씨도 잘 쓰며 공부 또한 잘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덕분에 6년 동안 학급간부를 면할 수 없어 친구들의 시샘을 많이 받아 억울한 생각도 들었었다. 학예발표회 때 사회는 물론 연구수업 때도 대표로 책 읽는 것은 내 몫이었고, 원고지에 글씨를 써서 견본으로 교실 뒤에 붙여 놓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펜글씨교본 등 숙제검사는 항상 A등급을 받았다. 글씨를 잘 써서가 아니라 정성 들여 또박또박 깨끗이 쓰니까 담당선생님께서 예쁘게 보았던 것 같다.

담당선생님께서도 글씨를 잘 쓴다는 소리는 안 하시고 "너는 이름이 예뻐서 'A' 주는 거야"하시는 소리를 듣고 더욱 열심히 글씨 쓰는 연습을 했으나 솜씨가 없어서 그런지 더 이상 늘지 않았다.

직장에서도 글씨는 잘못 쓰더라도 또박또박 썼다. 덕분에 잘 쓴다는 소리는 못 들어도 깨끗이 쓴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또박또박 쓰니까 공무원으로서 기안문서 작성이나 회계장부정리엔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숫자는 더욱 또렷이 쓰니까 회계감사 때마다 글씨를 참 깨끗이 쓴다며 장부가 깨끗해서 감사하기가 좋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러면 윗분들은 글씨를 아무렇게나 써서 감사반원들이 쉬 알아볼 수 없어야 감사를 잘 받는 거라는 말을 농담 삼아 해주는 분도 있었다.

잘 쓰지도 못하고 달필도 아니지만, 남이 알아보기 쉽게 또박또박 쓰는 글씨 때문에 사람이 진실성이 있어 보인단 소리를 들을 땐 민망스럽기도 하였다.

남편도 글씨체로 사람 됨됨이를 파악하려 했는지 맞선볼 때 내 주소를 자기 수첩에 적어 달라고 하였다. 난 속으로 '참 이상한 사람도 다 있네. 계속 만날지 아닐지도 모르는데 맞선 한번 보고 무슨 주소는'하며, 시큰둥했었다.

그래도 적어 달라고 수첩을 내미는데 적어 주지 않을 수가 없어 내가 근무하는 학교 전화번호와 집 주소를 적어 주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하는 말이 글씨 쓰는 습관을 보기 위해서였다나.

기가 막혀서 깔깔 웃으며 "그럼 글씨를 못 썼으면 지금 결혼도 못하였겠네요"했더니 그런지도 모르지 하며 싱긋 웃는다.

글씨를 정성 들여 또박또박 쓴 덕인지는 몰라도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진실치 않단 소리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내 귀가 어둡다기보다는 어머니 말씀을 잘 듣고 따른 덕분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문명의 이기인 컴퓨터 때문에 글씨 쓸 기회도 별로 없을뿐더러 글씨를 잘못 쓴다고 지적해 줄 어머니조차 아니 계시니 안타까운 마음만 더해 간다.

▶2000년 공우문학, 한맥문학으로 등단

▶청풍문학회, 청주문인협회, 한국문인협회, 수필문학회, 한맥문학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부회장(현)

▶충청북도교육청 재무과장 역임

▶ lnlny294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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