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무형문화재 이야기 <8> 사기장과 옹기장

햇볕 잘 드는 시골집 뒤란 복판에는 항상 장독대가 있었다. 장독대에는 간장과 된장, 고추장을 담아 놓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있었는데 할머니는 빛 좋은 날에는 뚜껑을 열어 볕을 쬐어주고 틈만 나면 윤이 나게 닦아주는 등 지극한 정성을 쏟았다.

부엌과 붙어 있던 장광에는 쌀과 참깨, 들깨, 팥 등의 곡식을 담는 항아리가, 방안에는 콩나물시루, 늦가을에서 초겨울 무렵에는 침 항아리를 볼 수 있었다. 물만 부어주면 으쓱으쓱 키를 올리는 콩나물들이 기특했고, 며칠 후면 떫은맛을 쏙 빼주는 침 항아리가 신기했다. 어머니는 팔팔 끓인 소금물을 한 김 내보낸 후 항아리에 떫은 감과 식힌 소금물을 담아 방안에 두었다. 얇은 이불을 덮어 온도를 조절했는데, 떫은 맛이 빠지는 데는 최소 3일이 필요했다. 그 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하루가 한 달처럼 여겨졌다. 어린시절엔 항아리가 요술단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랜기간 서민들의 밥상 위를 지켰던 식기는 막사발이었다. 투박하고 무거워 보이지만 손안에 넣으면 새털처럼 가볍다 여길 만큼 편안했다. 그릇을 두드리면 마치 나무를 두드린 것처럼 묵직한 목기 소리가 났으며 찻잔으로 이용할 때는 찻물이 스며들어 세월의 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나무 마디를 닮은 몸체의 힘찬 선에서는 숙련된 도공의 빠른 손길이, 거친 듯 부드러운 그릇의 기풍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전해주었다. 이번 기획에선 사기장과 옹기장을 소개한다.

막사발, 현대인의 밥상을 지켜라

■ 사기장 서동규

도자기는 구워내는 온도에 따라 토기(土器)와 도기(陶器), 자기(瓷器) 등으로 구분하는데 사기(沙器)는 백토 등을 혼합해 1천300℃ 이상의 고열에서 구워내는 그릇을 말한다. 조선초 궁궐의 사옹원(司饔院)에서 사기를 제작하던 장인은 380명, 후기로 접어들면서는 552명까지 규모가 확대됐다.

▲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서동규 사기장
특히 이들 사기장은 역할에 따른 분업화가 잘 되어 있었는데 누군가는 평생 불만 때고 누구는 평생 물레질만 할 정도로 각자의 영역에서 달인이 됐다.

하지만 1883년 관요(官窯; 정부의 관리 아래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폐쇄되면서 도공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된다. 관요와 그 분원의 폐쇄는 민간에서 도자기를 굽는 민요(民窯)의 번창을 불러온다. 전국의 도공들이 헤쳐 모인 곳은 사토(沙土)가 풍부한 지역. 문경, 괴산, 단양 일대에 주로 분포되었다. 단양 대강면 방곡리 역시 조선시대 민수용 도자기를 생산하던 곳이었다.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인 사기장 서동규(74)옹의 고향은 충북 단양이다. 아버지는 사기그릇을 만드는 도공이었는데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장작나무를 패러가는 길을 자주 따라다녔다. 그 때만해도 도자기라는 말 대신 사기그릇이라는 말이 통용됐었다.

단양 대강면은 골짜기가 전부 도자기 파편으로 가득할 만큼 도자기 마을로 유명했다. 어느 곳에서나 흙을 파면 사토가 나왔고, 망송이 가마가 50개에 달했다. 냇물조차 쌀뜨물처럼 하얀 색이었다고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민수용 도자기의 호시절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한국전쟁 이후 양은과 플라스틱이 보급되면서 도자기는 사양산업이 되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것은 화분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방곡도예에 입문한 것은 그보다 앞선 1956년 이었다. 3대째 이어오던 가업이 다시 활기를 띤 것은 1980년대 이후. 그 많던 도공들은 모두 떠나고 없는 상황이었다. 혼자였다.

▲ 방곡도요 서동규 사기장이 가마에 불을 때고 있다.


명장이 되고 나서는 2001년에 국무총리 표창을 받고 이듬해인 2002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0호 사기장으로 지정됐다.

방곡도요의 도자기는 전통방식으로 만든다. 황정산 소나무가 장작으로 쓰이고 화강암이 풍화된 흙에 진흙을 섞어 모래흙을 만든다. 여주에서 흙을 가져다쓰는 도공들과 달리 서동규씨는 인근 산에서 사토를 퍼 와서 쓰고 있다.

모래흙은 물을 넣어 토물가래로 휘저으면서 풀어주고 토물은 땅두멍으로 옮기는데 이 과정을 여러 번 거치면 앙금이 가라앉게 된다. 이것을 질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얻은 질을 질밭이나 봉당에 옮겨 말림으로써 사기 제작을 위한 토물 작업은 마무리된다.

다음은 꼬박 작업(흙을 개어 이기거나 도자기에 잿물을 바르는 일)과 물레 작업이 남는다. 두 과정은 움 속에서 이뤄진다고 해서 움 작업이라고 부르는데 토물작업을 통해 마련된 질을 치대고 반죽해 물레에 올려놓고 성형을 한다. 900℃가 넘는 불에 세시간 정도 초벌을 하고 잿물로 만든 유약을 바른 후 유약이 발린 그릇을 불에 열여섯 시간 재벌구이해서 최종 느릅나무 태운 재를 바르면 그릇이 완성된다.

녹자(綠磁)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방곡도요만의 특수 자기이다. 녹두색을 띤 자기를 말하는데 봄의 생기를 머금은 듯 푸르스름한 빛깔을 하고 있다. 녹자에 대한 서동규씨의 자부심은 특별하다. 느릅나무 재를 이용한 천연 유약과 좋은 흙으로 빚은 녹자는 전통 웰빙 도자기를 꿈꿔온 도공의 역작이었던 것이다.

그는 소탈하면서도 은은한 빛깔의 녹자가 쓰면 쓸수록 그릇의 가치를 가슴으로 느끼게 하고, 현대인의 밥상까지 건강하게 지켜주는 우리 그릇의 자존심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 단양 대강면은 골짜기가 전부 도자기 파편으로 가득 할 만큼 도자기 마을로 유명했다.


아흔아홉 가지 정성을 담아 빚다

■ 옹기장 박재환

옹기점이 들어선 곳에는 어김없이 흙과 나무가 풍성했다. 나무야 운반이 쉽다지만 흙은 중량이 무거워 옹기집은 항상 흙이 출토되는 곳에 자리 잡았다. 1987년 문화재관리국에서 조사한 지역별 옹기공방 위치만 봐도 충북의 7개 공방 가운데 강외면 봉산리에 두 곳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충청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인 옹기장 박재환(77) 옹의 얘기를 들어보자.

▲ 충북도 무형문화재 제12호 박재환 옹기장
"강외면 벌판 미호천 인근에는 1미터만 파도 그 속이 전부 점토질로 되어 있어요. 어르신들이 그걸 보고 이곳에 옹기집을 설치한 것 같어. 옛날에는 점촌(店村)이라고도 했어요. 지금은 화물차가 있지만 옛날에는 전부 등짐으로 운반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다만 백미터라도 가까운 데가 좋은 거지."

1970년대만 해도 봉산리에는 일곱개에서 여덟개의 옹기공장이 있었다. 옹기장이는 모두 세명. 하지만 대를 이을 제자와 후손을 두지 못하면서 그 많던 옹기장은 모두 떠나고 박 옹 혼자만 남게 되었다.

봉산리 흙은 분말이 곱고 섬세해 물을 담아도 새는 법이 없었다. 이런 이유로 해방 전까지만 해도 함흥과 청진까지 유통될 만큼 유명세가 대단했다. 박 옹이 옹기공장에 들어간 것은 열한살 때인 1943년이었다.

그는 '가정경제가 빈약하고 어려워서 식생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일에 입문했다. 중노동을 하게 된 처지였지만 완전한 도공이 되기 위해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석유등잔을 켜놓고 어른들 몰래 옹기 만드는 연습을 했다. 남들은 10년을 배워야 익힐 수 있었던 기술이었지만 그에겐 석달이면 충분했다. 눈썰미보다는 노력의 결과였다.

예나 지금이나 세월이 알게 해준 노하우는 쉽게 공개할 수 없는 법. 손에 익은 물레와 방망이, 수래, 도개, 근개, 물가죽 등의 기구들로 전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장인의 오른손에는 수래라고 불리는 부채가, 왼손에는 옹기 안쪽에 대는 둥근 나무토막 모양의 도개가 들려 있다. 그릇벽을 고르게 두드리는 모습은 언제 봐도 노련하다.

일반적으로 옹기를 만들 때는 그릇 바닥 부분을 먼저 만드는데 이를 태림질이라고 부른다. 바닥 부분이 완성되면 가래떡 모양의 떡가래로 벽을 쌓아올리면서 세타림이나 다섯타림을 쌓고 두드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박재환 옹은 세타림을 쌓고 두드리는 게 노하우 라고 했다.

수래질이 끝나면 사다리꼴 모양의 근개를 사용하는데 물레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서 안근개와 바깥근개를 이용해 그릇벽을 일정한 두께로 고르게 만든다.

▲ 옹기장 박재환 옹은 기술보다 중요한 것이 불을 다스리는 자세라고 강조한다.


일단 밑걸이 완성되면 그릇 어깨와 아가리(입)를 만들고 목가새라는 흙칼을 이용해 불필요한 부분을 잘라낸다. 물가죽은 아가리 모양을 정돈하는데 썼다.

모양이 완성된 옹기는 소나무 가지로 그늘을 만든 송침 밑 응달에서 일주일에서 보름간 말려주고, 습기가 다 증발된 이후에는 유약을 입힌다. 이를 잿물치기라고 부르는데 어느 정도 잿물이 흘러내렸다 싶으면 문양을 그리는 환치기와 다시 햇볕에 건조시키는 강정과정을 거쳐 가마에 넣고 구우면 된다.

한 평생을 옹기장이로 살아온 박재환 옹은 기술보다 중요한 것이 불을 다스리는 자세라고 강조한다. 아무리 잘 만든 옹기도 불을 조절하지 못하면 깨져서 실패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50가지가 넘는 다양한 옹기들을 만들면서 박 옹은 언제나 '아흔아홉 가지 정성을 들여야 한다'는 선조들의 격언을 가슴에 새긴다. 다만, 한 가지 근심이 있다면 봉산리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이다. 오송지역과 이웃한 강외면 일대가 개발권역에 포함되면서 이주도 염두에 둬야 하는 상황이다. 200년 동안 가업으로 이어온 봉산리 옹기공장과 가마터의 불안한 미래를 생각하면 늙은 옹기장의 가슴도 공허해진다. / 김정미

※자료협조 :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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