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카페> 김윤희

모처럼 강원도로 행보할 일이 생겼다. 빠듯한 일정에서 오후 짬을 내어 권금성을 찾았다. 멀리 보이는 설악산의 정수리는 희끗한 눈발을 뒤집어쓰고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올해 들어 처음 보는 눈이다.

단풍의 끝자락을 늘이고 있는 설악의 저문 가을은 흥청대는 5일장의 파장 풍경이다. 평일을 불문하고 초입부터 빼곡하던 주차장이 휑하다. 발 빠른 사람들이 마지막 단풍을 즐기기 위해 대부분 내장산 쪽으로 향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거침없이 케이블카 승강장 근처까지 올라와 차를 댈 수 있었다. 한창 철에는 어림도 없던 일이기에 조금은 횡재한 느낌이다. 휑한 주차장에 낙엽 몇몇이 떼구르르 제 몸을 둥글리며 빈 땅을 휘젓는 마음을 알 것 같다.

케이블카 탑승구 앞에는 제법 사람들이 웅성하다. 손깃발을 든 사람 주변으로 오종종한 사람들이 모여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주고받으며 얼굴빛이 환하다. 인솔자는 태국에서 온 여행자들이라고 귀띔을 해 준다. 잠시 후 탑승구 문이 열리자 산 아래로 펼쳐진 풍광을 감상하면서 가만히 선채 산을 오른다. 찬란히 불타오르던 단풍들은 이미 사그라 들어 골짜기가 갈 빛으로 숙연하다. 지금 이대로를 감상해도 좋지만 처음 설악을 찾았을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오색찬란한 단풍의 절정을 보여 주었더라면 더 인상 깊은 한국 여행이 되지 않았을까 잠깐 생각하는 사이 권금성에 도착했다.

권금성은 온통 바위투성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기암과 괴석, 나무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하늘과 어우러져 절경을 이루고 있다.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이다. 떼로 몰려 바위를 쓸고 있던 바람이 휘리릭 머리칼을 쓸며 인사를 건네 온다. 인사치고는 좀 거칠다 싶지만 이게 산사나이의 인사법인가 싶다. 바람은 대개 떠돌이지만 이곳 권금성의 바람은 뜨내기가 아니라 아예 눌러 사는지 다른 지역보다 텃세가 심해 보인다. 바위를 움켜쥐고 산등성이를 지켜 내고 있는 소나무들은 하나같이 제 몸을 세로로 잘라 반쪽을 바람에게 내어주고 동쪽으로만 가지를 벋으며 특이한 모양으로 살아간다. 일반적인 소나무의 형태로 보면 기형이 분명한데 절묘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몸 절반을 떼어주는 것으로 주변 어려운 환경에 순응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빚어낸 걸작이라 할 수 있다.



거대한 바위는 어린 소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틈새를 내어주고 나무는 바위를 의지한 채 바람에게 몸 반쪽의 가지를 내어준다. 바람은 바위를 쓸고 닦으며 함께 권금성을 지켜가고 있는 것이다.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덮이고 암석의 색깔이 눈같이 희다하여 설악이라고 이름하였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다. 오묘한 절경이 팔만사천 부처님의 말씀이라 한 것이 헛말은 아니지 싶다.

케이블카 승강장 아래쪽으로는 안락이라는 작은 암자 가는 길이 조붓하게 열려 있다. 안락암은 외형으로는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안내판 문구에 의하면 범상치 않은 곳이다. 봄이면 피어나는 안개로 청정법신께 향공양을 올리고 여름에는 소토왕골 바람으로 더위를 잊게 하며, 가을에는 오색찬란한 단풍으로 꽃 공양을, 겨울이면 처마 끝까지 눈이 쌓여 속세의 오욕과 번뇌의 티끌을 묻어 두니 법계의 진리가 여기에 있다 한다.

신라 자장율사께서 신흥사를 창건당시 산내의 암자로, 원효 의상 등 고승들이 이 초암에서 안좌수심하여 법계의 진리가 이곳에서 이어져 내려오면서 1975년에 복원하게 된 암자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절 아래로 800여년 노송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무학송이라 불리는 이 노송 역시 몸의 반쪽을 바람에게 뚝 잘라주고 한쪽으로만 가지를 벋고 있다. 기묘하고도 범상치 않는 기운이 감돈다. 무학송(舞鶴松)은 춤추는 학의 형상을 하고 있다하여 이름 붙여진 것이라는데 곧바로 무학대사를 떠오르게 한다.

무학대사는 불교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러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하여 無學(무학), 혹은 강보에 싸여 버려진 아이를 학들이 둘러싸서 보호했다하여 舞鶴(무학)이라는 호가 붙여진 조선건국의 왕사로 무학송과는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무학송과 무학대사가 하냥 생각되는 것은 비단 한글 동음어로서만은 아니다. 800여년 살아온 세월, 달관한 모습이 묘하게도 무학대사의 이미지와 닮아 보인다. 800년 닦아온 법계의 진리가 묻어난 게 아닌가 싶다. 권금성 산마루에 자라고 있는 어린 소나무들은 무학송을 큰 바위 얼굴로 삼고 그의 삶을 닮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락암과 무학송 사이 나란히 선 두 소나무 역시 심상치 않다. 각기 벋은 두 나무의 다리가 서로 녹아들어 한 몸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창 청춘인 듯 한 나무가 아무도 모르게 깊은 사랑에 빠진 게 분명하다. 이들은 단풍처럼 차려입고 흥청대던 사람들이 썰물 빠지듯 떠난 자리, 허허로운 바람이 휘돌다 어둠이 내려앉는 밤이면 그 적막을 이기지 못하여 서로 의지하며 외로움을 달래었으리라. 찬 서리 내릴 때부터 긴 겨울동안 시린 발을 서로 맞대고 나누던 정이 깊은 사랑으로 녹아들어 그리된 것이리라.

설악을 찾는 사람 중 이곳은 지나치는 사람이 많지만 그래도 무학송을 찾는 발길이 심심찮게 이어지고 있는 곳이다. 그럼에도 여태 잠잠한 걸 보면 이들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직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나 보다. 나무의 사랑 이야기가 발견되면 연리목 또는 연리지라는 이름으로 곧장 세상에 소문이 쫘 해진다. 이는 사랑을 해도 결코 몸을 섞을 수 없는 나무의 숙명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아무리 깊은 사랑을 해도 몸까지 합일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의 부러움의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산사의 목탁소리에 애잔히 깊어가는 설악의 저문 가을,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고 있다. 아직은 정수리만 하얀 모자를 쓰고 있는 저 설악이 점점 냉기 도는 눈으로 하얗게 덮여갈 것이다. 유난히 긴 겨울을 나야할 권금성의 나무들처럼 어려운 여건을 헤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힘들어지는 계절로 접어들고 있다. 연리지처럼 이웃끼리 서로 살 맞대고 정을 나누며 어우렁더우렁 한 몸 인양 갈아갈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이 그리운 계절이다. 불현 듯 아랫목 이불속에 조르르 다리 묻고 정담을 나누던 그때 그 시절, 화롯불에서 톡톡 밤 익어가는 소리가 그립다.



▶2003년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편집위원, 진천문인협회 회원

▶생거진천신문 편집위원

▶진천군의회의원

▶저서 수필집 '순간이 둥지를 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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