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20세기를 말하다 <76> 1980년대 루마니아 '4개월 3주, 그리고 2일' (크리스티안 문주, 2007)

부큐레슈티 소재의 대학 기숙사. 가비타(로라 바실리우)는 한참 분주하다. 책상 위를 치우고 걸레로 닦더니 테이블 시트를 몇 번 접는다. 어항의 물고기 먹이 걱정에 칫솔과 탈지면, 비누 등등을 챙기고 친구에게 빌려줬던 드라이어도 다시 찾아오기로 한다.

커다란 여행 가방에 이것저것 집어넣은 뒤에는 한 숨 돌려 제모를 하고 발에 매니큐어도 바른다. 안 그래도 딱 여행 가기 전날의 설렘과 부산스러움이 완연한데, 룸메이트인 오틸리아(아나마리아 마린차) 말을 들어보면 그것도 아닌가 보다. "여행 가는 애 같다"니.

어떤 이야기를 전할 것인지 짐작조차 어려운 제목의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은 수수께끼를 던지는 것처럼 시작한다. 가비타를 위해 기숙사 여기저기서 물건들을 사거나 챙기고 돈도 대신 맡은 오틸리아는 기숙사를 나와 남자친구 아디(알렉산드루 포토신)에게 돈을 빌린다. 전화 예약 확인이 안 된 호텔 대신 다른 호텔에서 겨우 방 하나를 빌린 오틸리아는 베베(블라드 이바노브)라는 남자를 만나 호텔로 함께 온다. 206호실에는 이미 가비타가 와 있다.

수수께끼는 30분이 훌쩍 넘어야 풀린다. "3개월째요." 마주 앉은 두 여자와 한 남자의 대화는 실로 충격적이다. 이 위험하고도 비밀스런, 2일에 걸친 여행 아닌 여행은 가비타의 낙태를 위한 것이었다. "이건 수술이 아냐. 관 하나 집어넣고 애를 죽이는 거야. 통증과 출혈이 있겠지만 마취할 정도는 아니야." 기말고사를 목전에 둔 겁먹은 얼굴의 여대생과, 콘크리트처럼 무심한 표정의 남자는 고혈압과 알레르기, 마취, 하혈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고작 비닐봉지 찢어 깔고 안전장치 하나 없이 불법 시술자에 의해 이루어지는 이 낙태 현장은 영화 도입부 자막-'루마니아, 1987'의 깊은 뜻을 즉각 환기시킨다. 이 어처구니없고 위험천만한 상황은 고스란히 당시 루마니아의 현실이었다. 피임과 낙태가 금지된 상황에서 극심한 식량부족과 경제난에 허덕이던 많은 여성들은 불법낙태를 선택했다. 여성들만의 네트워크를 통한 불법낙태가 횡행했으며 "걸리면 몽땅 감방행"이라는 베베의 말처럼 수술을 한 의사와 산모 등은 10년 이상 징역형을 살아야 했다.

이러한 모든 정황은 불편하고 낯설기만 한 영화의 스타일을 설명한다. 시종 흔들리며 인물을 뒤따르던 핸드 헬드 카메라와, 인공조명 없이 어둡게 가라앉은 화면, 음악의 철저한 배제와 롱 테이크 등 '4개월 3주, 그리고 2일'의 리얼리즘은 실로 건조하고 황량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는 가비타와 오틸리아가 처한 현실의 암울함과 강퍅함, 그리고 이를 통해 되새겨지는 차우셰스쿠 치하 루마니아의 현실을 위한 마침맞은 형식적 처방으로 납득된다.



20년간 지속된 차우셰스쿠의 출산장려 정책에 따른 불법 낙태로 50만 명의 여성들이 목숨을 잃었다. 여성과 생명의 가치에 대한 존중과 고민은 커녕 국가권력의 강권과 사회적 구제의 부재 속에 외롭게 방치됐던 그들처럼 가비타와 오틸리아 또한 죽음이거나 재앙과도 같은 고통을 당한다. 무심한 손길로 숱한 생명을 죽였을 낙태업자 베베는 이미 4개월을 훌쩍 넘긴 임신달수와 몇 가지 차질을 빌미로 둘의 몸을 요구한다. 대책 없이 어수룩해서 일을 키우기만 한 가비타와, 달리 어찌할 도리 없는 오틸리아는 침묵 속에 모든 것을 견뎌낸다.

이 가혹하기만 한 여성 수난극은 배경으로 묘사되는 당시 사회 현실에 힘입어 충격과 사실성을 배가한다. 담배와 비누, 사탕과 피임약 등 생필품의 암거래가 활성화된 현실에서 간단하거나 공식적인 거의 모든 업무는 켄트 담배를 통해야만 처리된다. 신분증 없이는 움직일 수 없는 때, 곳곳에서 암약하는 정보원만 두려운 게 아니다. 옛날 운운하며 여성의 음주, 흡연을 문제 삼는 기성세대와의 균열, 임신 출산은 물론 취업, 결혼마저 개인 의지와 상관없이 국가 지시에 좌우되는 현실에서 가난한 유학생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4개월 3주 된 태아를 어느 건물 쓰레기장에 버리는 것으로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길었던 오틸리아의 하루는 끝난다.

사람 사는 활기와 따스함을 찾아볼 수 없는 공포영화 세트장 같은 부큐레슈티의 밤거리에서 그래도 돌아와 쉴 곳은 무시무시한 비밀을 공유한 친구와의 초라한 식탁. "이제 이 일은 절대로 말하지 말자."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는 가비타를 침묵 속에 바라보던 오틸리아가 유리창 바깥, 스크린 너머로 시선을 돌리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 후로도 한없이 이어질 많은 이야기들을 생략한 채.

/ 박인영· 영화 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지원으로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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