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카페] 김윤희

이번 겨울은 초동부터 눈이 많이도 온다. 계사년 첫날 해맞이를 가려고 대문을 나서니 동살이 잡히기도 전에 눈발이 먼저 어둠을 가르고 있다. 살짝 환상적인 정취가 느껴져 하늘을 올려보다 이내 눈길 운전 걱정에 해맞이를 포기하고 들어왔다. 덕분에 따뜻한 이불 속에서 새벽잠을 맛 달게 자고 일어나긴 했어도 못내 아쉬워 창 너머로 함박눈 내리는 풍광만 감상하며 새해 첫날을 보냈다.

이튿날 제법 도톰하게 쌓인 눈을 뽀득뽀득 밟으며 걸어서 출근하는 길이, 마치 어릴 때 눈 내린 겨울 학교 가던 길처럼 느껴진다. 앞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을 밟으며 걸어보는 것이 실로 얼마만인가. 수십 년 만에 느껴보는 감회다.

보폭이 큰 발자국을 따라 걷다보니 숨이 좀 차다. 아마 처음 눈 위에 발자국을 찍고 간 사람이 다리 긴 남자였는가 보다. 벅찬 걸음이지만 발 젖지 않고 갈 수 있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할지, 발목을 빠져가며 내 보폭에 맞게 새로 길을 내야 할지, 살짝 갈등을 해 본다. 대로변으로 나서니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발자국이 어지러이 널려있다. 갑자기 따라갈 지표가 모호해진다. 새하얀 눈 위에 나만의 예쁜 발자국을 또렷또렷 찍어보고 싶은 치기가 든다.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뒤에서 따라 오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길이 되고 있음이 어디 눈에 보이는 길뿐이겠는가. 내 마음이면서도 스스로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 바로 마음길이거늘…….

시무식을 마치고 직원 몇 명과 같이 해맞이 터가 되고 있는 엽돈재를 찾았다. 예상했던 대로 아무도 지나간 흔적이 없는 눈세계가 펼쳐져 환호성을 일게 한다. 태초의 순수를 예서 보는 듯하다.



엽돈고개는 금북정맥에서 만뢰지맥으로 갈라지는 지점이며 천안시 입장면과 안성시 서운면, 진천의 백곡면이 인접해 있는 고개로 협탄령이라고도 부른다. 도회에서 멀리 떨어진 산 고개라는 의미만큼이나 구불구불한 고갯길에 산세가 험하다. 옛날에는 이곳을 넘나드는 사람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던 도적에게 모두 엽전을 털렸다는 말이 전해오기도 한다.

해발 350m 정도인 고갯마루에 오르면 스물여덟 개의 솟대가 멀리 동녘을 향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 스물여덟 솟대는 백곡면사무소와 스물일곱 마을을 의미하며 잣나무골이라고 불리는 백곡의 안녕을 빌고 있다.

솟대는 민속신앙에서 새해의 풍년을 기원하거나, 마을 수호의 상징으로 세운 나무 장대이다. 치솟아 오르는 듯한 장대는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로, 그 끝에는 나무로 만든 새를 올린다. 솟대의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 샤만이 천상계로 영적인 여행을 떠날 때 그를 인도한다고 믿는다. 하늘의 신과 인간을 소통해주는 전령조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솟대 끝에 올리는 오리는 물을 상징하는 신조로 물은 우리의 농경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다산과 풍요, 화재로부터 마을을 지켜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러기를 올리는 의미는 가을에 은하수를 따라 천상계로 날아갔다가 봄에 지상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하여 하늘의 축복으로 여긴 데서 기인된 것이다.

이렇듯 솟대는 종교적 상징성을 갖고 마을 공동체 문화로서 면면히 자리를 지켜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볼 때 이곳 엽돈재의 해맞이는 솟대와 함께 또 다른 감흥을 주기에 충분하다.

아무도 밟지 않은 순백의 엽돈 고갯마루/ 스물여덟 솟대가 동녘을 향해 서 있는 까닭은/ 새해 첫 해맞이 나선 이의 염원을 모두 안고/

협탄령 골바람 온 몸으로 맞으며 인간을 대신해/ 그들의 소망을 천상에 전하고 있음이다/ 솟대는 천상과 인간의 세계를 연결하는/ 소통의 신물로 영험함을 믿기 때문이다.

해맞이를 찾아 나선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도 솟대 앞에 늘여놓은 새끼줄에 소원지를 정성스럽게 매달거나 소망의 풍선을 날리며 그들 스스로 하나의 인간 솟대가 되어 하늘을 향한다.

맵싸하게 치고 도는 새벽 기운을 가르며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는 것은 분명 가슴 떨리는 환희다. 길고 지루한 어둠을 걷어내고 이 땅에 환한 빛과 온기를 주어 생명체에 윤기를 돌리는 강한 힘 때문이다. 도적들이 길목 지키던 골깊은 산 고갯마루에 서서 새해의 소망을 다시 꿈꾸어본다.

계사년 새해에는 가장 낮은 자세로
하늘도 보고 땅도 보며 느릿느릿 여유롭게
세상살이를 즐기며 살았으면 좋겠다.

천지가 이렇듯 오랜 동안 존재하는 이유는
해와 달이 제각각 자신의 궤도를 지키며
때가 되면 정확히 뜨고 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연은 결코 서두르지 않는데
오직 사람들만 허둥지둥 하는 것은
욕심에 저를 가두고 옥죄는 탓이다.

앞만 보고 바삐 달리느라 그간 보지 못한
허공에 떠도는 소소한 행복 잡아보고
발치에 머무는 풀꽃의 아름다움도 느끼며
비움으로 인해 누군가와 함께 채워지는 삶을 통해
기쁨 가득한 한해 되기를 간구하며 솟대를 본다.

순백에 서서 푸른 하늘을 응시하는 모습이 신성하다.



▶2003년 월간문학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원, 충북수필문학회 편집위원, 진천문인협회 회원

▶생거진천신문 편집위원

▶진천군의회의원

▶저서 수필집 '순간이 둥지를 틀다'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