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연 칼럼]대전·세종본부장

성종 17년 진사시에 장원급제한 임희재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차술(借述 : 남의 글을 베끼는 행위)로 장원급제를 해 물의를 일으켰다. 그의 아버지 임사홍 역시 차술로 문과에 급제했다. 조선 후기 이이첨은 시험문제를 알려주는 부정으로 그의 아들, 사위, 조카 등 7명을 과거시험에 급제하도록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와있는 장원급제 시험부정 사례중 일부다.

조선시대 가장 빠른 출세의 수단은 장원급제였다. 당시 치열한 경쟁을 뚫기 위해 시험부정은 곳곳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차술이나 시험내용을 유출하는 방법 외에 수종(시중드는 사람)들이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따라 들어가서 이를 베끼는 행위나 답안지를 바꿔서 제출하는 방법이 있었다. 또 응시자의 이름, 주소, 본관 등을 기입하는 위치를 합격자의 그것과 바꾸는 일종의 '시험지 바꿔치기'는 가장 악질적인 방법으로 통했다고 한다.

당쟁이 치열하고 과거시험이 문란했던 조선시대가 아닌 지금 시험 부정행위로 우리나라가 국제망신을 당하고 있다.

미국자격입학고사(SAT) 시험부정으로 SAT시험이 갑자기 취소되면서 응시생들은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게다가 현직 지상파 방송아나운서, 대기업 사원, 명문대생 등이 토익·텝스 어학시험에서 부정행위를 드러나 '엘리트 부정행위'가 도마에 오르고 있다.

국제자격시험에 만연된 시험부정 행위로 인해 외국에서는 한국 학생들의 성적을 못믿겠다는 분위기다.

실제로 지난 2007년 SAT 문제유출로 한국 수험생 900여명의 점수가 취소되는 사건을 치렀다. 이어 2010년에는 태국에서 시험을 치르고 미국으로 시험지를 빼돌리려던 조직적인 시험부정행위가 들통나기도 했다. 토플시험은 계속되는 부정행위로 인해 2000년 이후 시험방식이 두번이나 바뀌었다. 미국대학원 입학시험도 2002년 문제유출로 시험 횟수 축소라는 벌칙을 받아야만 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을 이용한 시험부정이 광범위하게 저질러지고 있다. 지난 1월 미국 주립대 출신 심모(25)씨와 친구 김모(25)씨가 서울 양천구의 토익시험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부정행위를 한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 기소됐다. 앞서 지난해 8월에는 스마트폰을 이용해 토익·텝스 시험부정행위가 적발돼 노모(21)씨등 일당 4명과 시험을 의뢰한 공무원·교사·대학생 37명이 경기지방경찰청에 불구속 입건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SAT와 미국대학원 입학시험, 토플 등 각종 시험을 주관하는 미국교육평가원으로부터 '요주의 국가'로 지목돼왔다. 대학입학과 관련된 모든 국제 자격시험에서 한국은 감시를 받아야하는 신세다.

시험부정이 끊이지 않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명문대 입학과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문제가 된 SAT시험 역시 외국 대학입학과 관련된 시험이다. 게다가 대학 서열화에 길들여진 우리의 학벌 풍토, 자녀의 외국 명문대 입학을 갈구하는 부모와 수험생들의 비뚤어진 교육열, 이를 이용해 돈을 벌어보려는 학원과 브로커의 합작품이 바로 시험부정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험 부정은 비단 외국입학 시험만이 아니라는 것이 슬픈 현실이다.

현재 수사가 진행중인 충남도교육청 장학사 시험문제 유출사건은, 현장을 감독해야할 장학사가 시험문제를 빼돌렸다는 점에서 매우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우리는 자라면서 시험을 잘 치르고, 합격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왔다. 학벌이 최우선시 되는 시대에 명문대 입학과 스펙을 쌓기 위해서는 시험과 합격이라는 절차를 통과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목표 달성을 위해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대리시험은 물론 내신성적을 올리기 위한 편법이 동원된다.

잇단 시험 부정에 대해 전문가들은 과도한 경쟁이 빚어낸 성과주의, 스펙만능주의, 결과지상주의가 만들어낸 참사라고 분석한다. 그러니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해이가 만연된 환경에서 자란 젊은이들이 시험부정의 도덕불감증에 빠지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사회에 팽배해 있는 스펙주의·점수주의와 명예·권력지상주의의 틀을 바꾸지 않고서는 '시험부정의 나라'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다.

지난 1일 한국을 방문한 세계적인 명상 수행자 틱낫한 스님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청년문제를 묻자 이렇게 답했다. "젊은 수행자 중에 돈, 차, 휴대전화, 컴퓨터는 물론 은행계좌도 없는 사람이 많다. 행복은 돈이나 명예, 권력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때 얻을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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