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변광섭 청주시 첨단문화산업단지 부장

고단하고 막막했다. 암흑같은 터널을 언제 빠져나갈지, 그 끝이 있기나 한지 모두들 불안해했다. 폐허가 된 국토를 재건하고 백성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갈망했지만 모든 것이 역부족이었다. 전후 상흔이 아물지도 않았고, 그 상처와 아픔으로 민심은 흉흉했으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아픔이 없는 사회를 일굴 수 있는지 막막할 뿐이었다. 새로운 도전과 교육, 경제부흥을 일구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었지만 정부의 곳간은 텅 비었고 사람들의 열망도 궁핍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은근과 끈기와 불굴의 투지로 버텨온 민족이었기에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정부는 벼랑끝 전술을 선택했다. 청년들을 베트남으로 파병했고, 건장한 남자들은 독일의 광부로, 꽃다운 여인들은 독일의 간호사로 보냈다. 전국 곳곳에 담배를 심어 농가 소득원을 높였으며, 권역별로 담배공장을 세워 일자리를 늘리고 세수를 확충해 나갔다. 지구촌을 무대로, 밤낮없이 일하는 것만이 멋진 신세계를 펼칠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이었던 것이다.

세상에 쉬운 사랑은 없다. 아름다운 꽃이 피고 알곡진 열매를 맺는 것 역시 북풍한설과 작열하는 태양과 모진 태풍을 이겨내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의 일 역시 경제부흥과 한강의 기적을 만들기까지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픔이 따르게 마련이다. 광부로, 간호사로 멀고 먼 이국만리로 떠날때는 온 나라가 눈물바다였다. 오직 하나, 가족과 나라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를 담금질 하고 등신불 같은 희생이 없이는 안되는 것이었기에 운명처럼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 땅의 어머니가 되어 아픔이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헛헛하고 슬프고 잠 못 이루는 모든 사람들을 보듬고 싶었다. 방방곡곡을 다니며 세상 사람들을 품고 사랑하며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1966년 11월 12일. 찬 바람이 가슴에 스며들고 햇살조차 시름겹던 그날 당신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청주연초제조창을 찾았다. 3천여 명의 근로자들이 쾌쾌한 냄새를 토해내며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노동의 현장이었다. 연간 100억 개비를 생산하고, 수출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담배공장이었다. 당신은 그날 수많은 근로자들의 손을 꼭 잡고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여러분의 진한 땀방울은 씨앗이 되고 꽃이 피어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일 것입니다"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간의 아픔과 슬픔과 고단한 노정이 한 순간에 씻겨나갔으며, 희망과 사랑이라는 들뜬 마음을 고이 간직하게 됐다. 그날 당신은 목련 한 그루를 심었다. 아니, 목련같은 맑고 향기로운 불멸의 사랑을 사람들의 마음에 심었다.

세월은 어느덧 48년이라는 형상을 넘어서고 있다. 담배공장은 폐쇄됐고, 그날의 영화도 온데간데없어 뒤태가 쓸쓸할 뿐이다. 사람들은 다시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다. 더 이상 담배는 생산되지 않지만 문화를 생산하고 문화콘텐츠를 수출하며 문화예술로 하나되는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계 최대 규모의 공예축제인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를 이곳에서 개최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의 첫 지방분원인 수장보존센터를 유치하고, 문화산업단지도 조성했다. 세상 사람들은 거칠고 야성적인 대규모 공간이 아름답고 유쾌한 세계적인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며 관심을 갖고 있다.

지금 당신의 딸이 대통령이 됐다. 당신의 못 다한 꿈을 일구고 세계 일등 국가를 만들겠노라 다짐했다.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으로 더 멋진 세상을 만들기로 했다. 그 중심에 옛 청주연초제조창이 있으니 이 보다 더 의미있고 묘한 인연이 또 있을까. 어머니는 이곳에서 피와 땀과 눈물을 닦아주셨으니, 이제 딸이 창조의 가치를 심고 예술의 꽃을 심어야 할 차례가 됐다.

마침 오는 9월 11일부터 40일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이곳에서 열린다. 60개국에서 3천여 작가가 참여하는 세계 최대규모의 공예축제다. 초대국가는 독일인데 올해가 한·독 수교 130주년이고, 광부·간호사 파독 50주년이 된다. 그날의 허허로움과 아픔을 보듬어주면 좋겠다. 문화예술과 창조경제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가슴 떨리는 출발점이 되기를 갈망한다. 그리하여 아픔이 없는 세상, 우리 모두가 앙가슴 뛰는 설레임으로 노래하고 춤을 추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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