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칼럼] 오상영 영동대 경영학과 교수

인류의 발전은 파괴적 역사를 통한 변곡점에서부터 시작했다. 파괴(Demolition)는 인류에게 고통과 기회를 동시에 부여한다. 기존 질서의 파괴로부터 기존의 것을 잃기도 하고 새로운 것을 얻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류는 상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수많은 전쟁은 인간을 고통에 빠뜨렸지만 지배계층 또는 지배국가의 몰락을 가져오기도 했다.

인류 발전의 철학과 사상적 토대를 만들었던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 예수 그리스도 등 많은 성인들도 고통과 죽음으로서 인류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남겼다. 인류에 있어 창조와 혁신의 대명사는 14세기 유럽의 르네상스(Renaissance)일 것이다. 천년이 넘는 신(神)의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를 찾고자 목숨을 던진 선지자들의 노력이 문자 그대로 '재생'을 뜻하는 인류의 변혁 시기를 맞게 된다.

신의 경지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데 까지 천년 이상이 걸렸으니 종교 개혁의 대가가 어느 수준이었을까 상상하면 짐작하고도 남는다. 무한 우주설을 주장한 조르다노 부르노는 화형을 당하지만 마녀사냥이 횡횡하던 신 중심 시대의 종막을 예고한다. 아무도 가지 않은 서인도제도를 선택한 콜럼부스는 이사벨라 여왕의 후원을 받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다. 돈키호테는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노구의 몸으로 결투를 멈추지 않는다.

영국의 문호 세익스피어가 아내, 부모, 자식, 그리고 친구를 죽이게 되는 4대 비극을 저술한 배경은 그가 만든 주인공 햄릿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햄릿은 사색적이면서 격정적인 사람으로 그 시대의 인간적 고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러한 고통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 한다'는 데카르트의 선언이 나오면서 빛을 보기 시작한다. 이들의 희생이 인간의 해방과 자유로운 탐구와 비판력을 자극하여 인간의 사고와 창의력에 새로운 자신감을 주입하게 된다. 그 결과로 종이, 인쇄술, 항해술, 화약 등의 등장하고 세상의 변화는 상전벽해를 이룬다. 16세기 말 종교개혁을 맞으면서 르네상스의 혁신적 변화는 유럽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루게 되는데 이러한 역사의 창조적 변화는 인류의 끊임없는 헌신 또는 투자의 결실이었다.

변화(Change), 혁신(Innovation), 창조(Creation)는 이미 오래 전부터 경영, 경제 분야의 화두였다.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창조경제를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창조적 경제가 더욱 부각되고 있지만 이미 아담스미스 국부론 이후 경제는 창조적 경제를 견지해왔다.

그러나 좀 더 적극적인 창조적 경제를 통해 국부를 창출하고자 한다면 역사적 증거를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변화, 혁신, 그리고 창조는 개념 정리에 앞서 상당한 투자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류가 일군 창조와 혁신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과 적극적인 투입에 대한 대가였다.

최근 정부를 포함한 기업, 대학 등 위기를 맞고 있는 조직은 혁신과 창조를 위한 인적, 조직적 구조조정을 끊임없이 추구하고자 하며 구성원들의 정신적 무장, 위기 극복을 위한 활동성 증대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혁신적, 창조적 활동을 지원할 투자의지는 부족하다. 창조를 부르짖는 대개의 리더들은 투자에 인식하다. 희생 없이 단물이 나오길 기다리는 것은 인과관계의 오류를 범하는 있는 명제가 참 명제가 되길 원하는 것과 같다. 희생 없는 혁신도 창조도 없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알 수 있지 않은가.

일제의 압박에서 벗어나 곧바로 전쟁을 치른 폐허의 한국이 한강의 기적을 이룬 것도 낯선 만리타국으로 팔려나간 사탕수수밭 농부, 외화벌이 간호원, 살인적인 더위와 싸운 중동 건설노동자, 전쟁 파병 등 조국을 위한 희생의 대가이다. 인과생기(因果生起)는 뿌리는 대로 거둔다는 불변의 자연법칙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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