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7월의 도시는 눅눅하고 고단하며 뜨겁게 불타오른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으로, 들로, 바다로 일탈을 시도한다. 필자는 먼 길 떠날 팔자가 아니기 때문에 주말 새벽을 이용해 도시 인근의 숲길, 물길, 들길을 따라 걸었다. 산성에서부터 시작해 운보의 집에서 예술감상을 즐기고, 비상리의 마을풍경에 마음 적시고, 초정리의 약수목욕으로 더위를 식히고, 증평 율리의 호수와 들길과 숲길을 따라 자박자박 걸었다.

이 길은 세종대왕 100리길이다. 맑고 풍요롭고 한적하고 향기로웠다. 눈길 닿는 곳마다 오랜 세월 인고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소나무 숲이요, 마을 어귀마다 느티나무 풍경이 한유롭다. 흐르는 계곡물 하얗게 부서지고, 돌담길 오르내리는 다람쥐 조물조물 정겹고, 이끼 낀 지붕위로 이름 모를 새 한 마리 노랫소리 오달지고, 시 한 수 읊는 노인의 목젖은 세속의 매서움을 이겨냈기에 어엿하고, 한줄기 햇살과 맑은 바람과 한가로운 뭉게구름이 숲속으로 밀려오니 노래하는 합창, 시공을 초월한 미학, 소풍가는 악동이다. 불현듯 번잡하고 고단한 삶의 보따리를 내려놓고 싶다. 이곳에 눌러앉아 시인의 집을 짓고 싶은 충동이 솟구친다.

옛 사람들은 여름철 건강을 물과 차, 그리고 음식으로 다스렸다. 동의보감에 나오는 물의 종류만 해도 30여 가지나 되고 치료와 보양을 위해 온천을 즐기기도 했다. 특히 태조ㆍ정종ㆍ태종ㆍ세종 등 조선의 왕은 질병치료를 위해 온천을 자주 이용했는데 <세종실록>에 보면 "청주에 물이 있어 맛이 초(椒)와 같아 초수(椒水)라는 이름 지어 여러 질병을 다스렸다"고 했다. 여기서 초수는 지금의 초정리다. 세종대왕이 한글창제의 과업을 이루던 중 심한 스트레스와 눈병이 나서 초정리에 행궁을 짓고 치료를 한 곳으로 유명하다. 초정리에서는 단오날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모여 맑은 물로 머리를 감고 등목을 하였으며, 씨름을 하고 그네뛰기를 즐겼다. 동네 청년들은 산속으로 달려가 계곡물에 발을 담갔다. 일종의 탁족(濯足)을 즐긴 것인데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더위를 대비한 시골 사람들만의 지혜였다.

이밖에도 숲 속에서 상투를 풀고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사타구니에 볕과 바람을 쬐는 풍즐거풍(風櫛擧風)이 조선시대부터 유행했다고 전해진다. 풍즐거풍 세 번이면 삼복에도 무사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고, 선비들에겐 피서인 동시에 피부병을 예방하는데도 유익했다. 차를 잘 마시는 것도 건강을 다스리는 방법 중 하나다. 커피나 음료수처럼 인스턴트식품에 오염돼 있는 도시인들에게 차는 몸과 마음을 청량하게 해 준다. 차에 있는 각종 무기질은 우리의 몸을 약알칼리로 유지하는 효과가 있으며, 특히 식사 후에 마시는 차는 산성화되기 쉬운 혈액이 약알카리를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예방기능도 갖고 있다.

퇴계 이황은 <활인심방>이라는 의학서에서 '좋은 마음과 반듯한 생활습관'을 건강의 비법으로 소개했다. 맑고 깨끗한 마음,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다스릴 수 있는 절제된 생활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소서팔사(消暑八事)'를 더위를 쫓는 8가지 방법으로 꼽았다. 솔밭에서 활쏘기, 홰나무 밑에서 그네타기, 빈 누각에서 투호하기, 대자리 깔고 바둑 두기, 연못의 연꽃 구경, 숲 속 매미소리 듣기, 비 오는 날 시 짓기, 달밤에 탁족하기…. 이 얼마나 운치 있는 피서법인가.

올 여름은 생명의 숲을 벗 삼고 문화공간을 애용하며 문화적인 삶을 즐기면 좋겠다. 이 땅의 산과 계곡과 들과 강과 오솔길을 오가며 대자연의 신비를 호흡하는 것이다. 시집이나 에세이 한 권을 벗으로 삼으로 몸과 마음이 한결 가벼워질 것이다. 그리고 박물관 미술관을 내 집 드나들듯 하고 각종 공연장에서 누적된 피로를 풀면 좋겠다. 내 삶이 저잣거리의 번잡하고 어수선한 물욕에 오염돼 있다면, 그래서 더욱 마음이 시리고 아프다면 문화로 마음을 다스리고 치유해야 한다. 문화는 가진 자의 것이 아니다. 즐기고 참여하며 소통하는 자의 것이다. 지금 내 마음의 물줄기가 하얗게 부서지고 있다. 작열하는 햇살도 내 마음의 바다에서 오색찬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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