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은 태양이 도시를 삼켜버릴 것 같은 한여름 어느 날 오후, 남들은 바다로 계곡으로 더위탈출을 즐길 때 서울로 향하는 KTX에 몸을 실었다. 출판사에 들러 업무협의를 하고 갤러리에서 전시 한 꼭지 훔쳐본 뒤 국립극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비릿한 땀내로 진동하는 몸을 이끌고 국립극장 건물 앞에 이르는 순간, 어디선가 맑은 바람이 쏜살같이 달려와 내 품을 와락 껴안았다. 햇살 틈을 비집고 쏟아지는 낯선 바람에 포위돼 한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내가 여기를 왜 왔던가. 어디로 가야할까. 각다분한 생각을 비우고 주저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공연 보러 오는 사람들로 극장 주변은 문전성시였다. 공연장 붉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객석은 관객들로 가득찼다. 나는 이만하면 됐다는 안도의 쉼표를 찍었다. 본능이다. 공연을 보러 온 것이 아닌데 무대가 궁금하고, 객석이 그립고, 사람냄새가 좋은 것은 본능이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어떤 꿈을 빚고 어떤 열매를 맺을까 궁금하기도 했으며, 이대로 눌러 앉아 공연 한 편 보고 싶다는 충동에 젖었다.

안호상 국립극장장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묘한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우리나라 최초의 문화행정가로서 20년 넘게 예술의전당 공연기획을 맡아왔다. 1990년대 후반에 국내 처음으로 말러 교향곡 시리즈를 선보였고, 대중가수로는 처음 조용필 씨를 예술의 전당 무대에 세웠으며, 토월 정통 연극시리즈, 오페라 페스티벌 등을 기획하며 예술의 전당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공연기획계의 '미다스의 손'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서울문화재단 대표를 거쳐 국립극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국립극장 시즌제를 도입하고 국립창극단 공연 매진사례를 만드는 등 안호상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나는 극장장과의 만남 속에서 작고 부드럽지만 강하고 열정적인 카리스마를 느꼈다. 일 속에서 행복을 찾고, 일 속에서 힐링을 즐기며, 일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만들어간다는 그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솔깃했다. 무엇보다도 "공연을 준비할 때는 예술가의 의견을 존중하고 예술가의 꿈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지만 최종적인 결정은 관객의 입장에서 한다"고 말 할 때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언제나 객석이 궁금하다고 했다. 객석이 꽉 찰 때, 객석의 사람들이 박수칠 때, 객석의 사람들이 맑은 미소를 던질 때 대한민국 르네상스의 꿈이 현실이 될 것이라는 그의 곧은 말에 가슴이 먹먹해지기 시작했다.

필자도 문화기획자로 일하기 시작한 지 10년이 훌쩍 넘었다. 그동안 공예비엔날레를 주관했고, 한국공예관과 직지축제와 청주읍성큰잔치를 기획해 왔다. 청주시문화재단이라는 결코 작지 않은 조직에서 문화로 행복한 아름다운 청주를 만들겠다고 앞장서 왔는데 과연 나는 관객 입장에서, 시민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고민하고 실천하였는지 생각하니 부끄러울 뿐이다.

한 일(一)자를 10년 동안 쓰면 붓 끝에서 강물이 흐른다고 했다. 한 분야에 하루 세 시간씩, 10년 동안 몰입하면 최고의 전문가인 아웃라이어가 된다고 했다. 명가의 비결도 이와 다르지 않다. 60년이 넘도록 부채 만들기에 전념해 온 일본 최고의 부채 장인 후루타 간죠씨는 성공비결로 최고의 재료, 최고의 기술, 최고의 정성, 최고의 예술, 그리고 최고의 마음이라고 했다. 부채 하나를 팔 때도 가치를 담으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오스트리아 구두 명가인 루돌프 세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을 만들겠다는 것이 기본 철학이다. 200년 역사를 간직하면서 오스트리아 빈의 골목길 가게를 관광객들로 가득 메우는 비결은 사람들의 발이 제각기 다르듯 신발 역시 똑같으면 안되기 때문에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맞춤형 신발을 만들어 온 것이다.

이처럼 최고의 전문가, 최고의 장인은 한 눈을 팔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입하며 혁신과 창조와 배려와 가치를 중시한다. 충북출신인 국립극장 안호상 극장장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이며 무엇으로 살아왔고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는가. 내 삶의 마디에도 푸른 강물이 흐르고 있는가. 그 속에서 수많은 물고기가 뛰어 놀고 있는가. 이 분야의 최고의 가치를 지니고 있는가. 그리하여 나는 대한민국 청주와 청주사람들에게 가슴 따뜻한 그 무엇으로 남아 있는가. 아니 그러한 존재가 되려고 노력은 하였는가. 오늘 나는 내게 다짐한다. 앙가슴 뛰던 처음으로 돌아가자. 나만의 욕망과 헛된 꿈을 접고 행복의 근원을 찾아보자. 그 속에서 아름다운 백만송이의 꽃을 피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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