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눈] 문상오 소설가

저는 농민입니다. 여적지 참고 참아왔지만 갈수록 그 피해 우심하기에 고발장을 냅니다. 멧돼지란 놈, 이놈은 칠년대한(七年大旱)이나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놈으로, 한해 농사를 아주 결딴내고 있습니다. 뿌린 씨앗을 쪼아 먹는 산비둘기도 있고 애기순을 뜯어먹는 고라니 등속도 있긴 합니다만 이놈 멧돼지에 비하면 부처님 가운데 토막입니다.

오늘 아침입니다. 실하게 여문 미백 찰옥수수를 꺾으려 서낭댕이 밭엘 갔더니, 참내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옵니다. 교묘하게도 가장자리만 빙 둘러 세워 놓고는 밭 한 뙤기를 모조리 거둬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멀리서 볼 땐 어떤 흔적도 없었으니 짐작조차 못했지요. 난장판이 된 밭보다도 위장막까지 둘러놓고 안쪽만 거둬간 교활함에 혀를 내두르고 말았습니다. 멧돼지 머리 둔하다는 말, 더는 안 하기로 했습니다.

하긴 지난 해였지요 아마. 앞뜰 논을 갈아 고구마를 심었습니다. 인적 붐비는 한길까지야 출몰하랴 싶었던 거지요. 근데 웬걸요. 하얀 무서리가 내리던 날 새벽. 달랑 한 줄만 남겨놓고는 '매란 천지 없이' 파헤쳐진 게 아니겠습니까. 섭섭하긴 했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한 줄이나마 남겨둔 걸 감사할 밖에요. 그런데 이튿날 아침, 지개 고삐를 조이던 나는 망연자실하고야 말았습니다. 남은 한 줄마저 그예 다 훑어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순간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멧돼지란 놈, 이런 놈입니다.

그럴 동안 그래 보고만 있었냐고요? 말도 마십시오.

올무나 덫을 놓으면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돌아가기를 귀신같이 하고, 쇳냄새를 싫어한다 해서 쇠말뚝에 철망까지 쳐놓았더니 땅바닥을 헤집고 다니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한 붉은 깃발을 세운다, 녹음된 총소리를 확성한다, 썩은 돼지머리까지 걸어놓아 봤지만 그때뿐으로, 그것들이 가짜라는 걸 알아보는 데는 채 이틀도 안 걸리더군요. 힘만 가지고도 항우장사인데 머리 잘 돌아가고 눈치 빠르고 보니 농민들로서야 속수무책일 따름입니다.

요즘엔 글도 깨우쳤는지, 유해조수 포획허가를 받은 엽사들이 들이닥칠라 싶으면 어디론지 줄행랑을 치고 맙니다. 그 피신해 간 장소가 교묘하게도 국립공원지역 아니겠습니까. 국립공원 내에선 포획이 금지되었단 걸 아는 거지요. 혀를 내두를 판입니다. 탄복하다마다요. 한술 더 떠 독도법도 배웠나봅니다. 글께나 읽었다는 나조차도 도랑 건너가 국립공원인 줄은 놈들이 몰려간 다음에서야 알았으니까요.

그렇다고 함부로 대할 수도 없습니다. 잘못 건드렸다간 보복당하기가 십상이거든요.

요즘 놈들은 혼자서가 아니라 꼭 떼로 몰려다닙니다. 많게는 열 두엇, 적어도 대여섯씩. 한 가족인 셈인데 가족 간 우애도 어지간해서 아비는 앞장서고 어미는 맨 끝에서 새끼들을 돌보는 형국입니다. 새끼 중에 하나가 해코지라도 당한다 싶으면 무작정 들이받습니다. 저돌적이란 말 아시죠? 앞뒤 가리지 않고 덤비는 놈이 바로 이 멧돼지란 놈입니다. 오죽하면 '설맞은 돼지 같다'고 할까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금년 농사도 위태위태합니다. 태풍이나 가뭄 같은 천재지변 때문이라면 누가 뭐라겠습니까. 하늘에 매인 것이 농사라 자포자기 수긍할 밖에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고, 교활하기로는 '백여시'보다 더한 놈들에게 빼앗길 걸 생각하니 억장이 무너져 잠도 오질 않습니다.

더는 참을 시간적 여유도 방안도 없겠기에 이렇게 고발장을 냅니다.

상생이란 질서이자 수분(守分)이라고 들었습니다. 삼라만상이 제 위치에서 제 갈 길을 가는 것. 다른 부류나 집단의 경계를 넘보지 않고 분복대로 살아가는 것. 그런데 작금의 멧돼지들은 다른 종속은 안중에도 없이, 오직 저 하나밖에 모르는 야만적이고 이기적인 행태로 온 들판을 분탕질해대고 있습니다. 청하옵건데 우선은 속달등기 편으로 엄중히 경고를 해주시고, 그래도 말썽이라면 놈들을 엄벌에 처해주실 것을 간곡히 당부 드립니다. 이제는 글도 깨우쳤다고 하니 어지간하면 알아듣질 않겠습니까?

그리만 해주신다면 감나무에 까치밥 남겨놓 듯, 뭇짐승들 겨우살이에 부족함 없도록 그 어느 해보다 넉넉하고 풍성한 가을로 만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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