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대째 산성마을 지키는 모송근씨

"공기가 좋아. 산책로를 한 바퀴 돌면 대청호도 보이고, 맑은 날은 독립기념관 뒷산도 보이지. 그것 말고는 자랑할게 마땅 칠 않아. 동네 인심이라도 예전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는데…."

모송근(72)씨는 증조부에서 조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산성마을을 지켜온 마을 터줏대감이다. 마을 자랑을 청하자 과거를 회상하며 온정이 사라졌다고 아쉬워 했다.

"보릿고개가 심할 때는 밥도 제대로 못 먹었지만 인심이 얼마나 좋았는지 온정 있게 살았어. 밀농사 져서 국수를 하면 멍석 깔고 둘러앉아 다 같이 나눠먹었지."

모씨는 허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오지였던 시절이 그립다고도 했다.

"전쟁 때 우리 마을은 피난도 안 갈만큼 오지였어. 어렸을 때는 60가구 정도 살았는데 동갑네가 열 세 명이나 있어서 장난도 많이 쳤지. 상봉재를 넘어서 옛길로 학교를 다녔는데 만날 지각이지 뭐. 1시간 30분도 걸리고 2시간도 걸리고."

지금은 산성터널이 뚫렸지만 옛 도로(명암로)도 포장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조붓한 산길을 통해 학교를 다녔다.

"나무를 때던 시절에는 동네 사람들이 나무를 해다 청주에서 팔았어. 나무 파는 데가 무심천 뚝방 소전(우시장)이 열렸던 곳 하고 옛날 연초제조창 자리의 안덕벌에 있었지. 무심천으로 가려면 상봉재를, 안덕벌로 갈려면 성곽이 허물어진 서문 쪽을 통해서 율량 상리로 넘어갔어."

마을로 향하는 도로가 개설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모씨는 "이승만 정권 때 시작된 도로 포장 공사는 전두환 정권 때 마무리 됐다"고 설명했다.

산성마을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1980년대 즈음. 1982년 2월 15일 행정구역이 청원에서 청주로 변경되면서 버스 노선이 개설되고 한옥마을도 조성됐다.

"집을 개축할 때 정부에서 보조금 하고 융자를 받았는데 갚을 능력이 없잖아. 무허가로 술장사를 시작했다가 단속도 많이 받았어. 융자 상환을 위해서 음식점을 한다고 하니까 나중에는 음식점 허가를 내주더라고."

그가 30년 넘게 지켜오던 두부요리전문점은 아들에게 대물림했다. 아들 병수씨는 돌아가신 어머니 손맛을 그대로 전수받은 두부요리와 '숨두부'(순두부의 방언)를 특화시켜 '마오의 두부사랑 이야기'(옛 민속주막)를 운영하고 있다. 손주까지 얻으면서 모송근씨 집안은 6대째 산성마을을 지키는 대표 토박이가 됐다.

산성마을의 가구 수는 31가구. 최대 80가구까지 모여 살던 마을에는 31채의 집만 남게 됐다. 청주시에서 매입한 4채를 제외하면 27가구. 마을 주민 대부분인 21가구가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이제는 외지 사람들이 반이여. 서로 같이 살아야 하는데 경쟁을 하다보니 인심이 각박해졌지. 장사 안 할 때 인심으로 되돌아갔으면 좋겠어. 제사 지내면 밥 한 공기, 김 몇 장, 손바닥만 한 조기도 몇 점씩 나눠먹고 어른 공경할 줄 알았던 옛날. 그 때가 정감 있고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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