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만추(晩秋)의 풍경은 하나같이 가난하고 고독해 보인다.

그토록 찬란했던 생명들이 사위어가고, 소연(蕭然)한 정취가 낮은 숨소리를 내며 몸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면 헛헛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나짐 히크메크는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써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려지지 않았다.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이라며 진정한 삶이 무엇인지 노래하지 않았던가.

조촘조촘 땅거미가 잦아드는 시골길 풍경을 품으며 굼뜬 걸음을 할 때면 나그네의 어깨에는 정처없는 바람의 소리, 석양의 노을 지는 소리, 낙엽 흩날리는 소리, 무디어진 영혼을 깨우는 문풍지 소리, 그 어느 날 내 품에 안겼다가 황망하게 떠나간 여인의 뒤태와 발자국 소리가 스쳐간다.

11월은 이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시리고 아프게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겨울이 오기 전에 일탈을 꿈꾸며 거리를 나선다.

논두렁 서리태와 녹두꼬투리가 속살을 비집고 탱탱한 자태를 뽐내는 들길을 걷기도 하고, 낙엽 진 자작나무 숲에 앉아 시인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며, 햇살 부서지는 강변길을 거닐며 잊혀져 간 사랑을 찾으려 한다.

홀로의 자유에 목이 탔던 방랑자는 차창 밖으로 쏟아지는 가루마같은 풍경에 입술을 비집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때론 헐겁고 곤궁한 농부들의 삶에 아픔이 밀려오기도 할 것이며, 대자연의 풍경 속에서 삿된 욕망에 젖은 자신의 모습을 보며 목젖이 아파 먹먹해 했을 것이다.

나는 가을의 끝자락에 서울에서 온 낯선 사람들과 함께 대자연의 풍광을 품으며 아름다운 추억, 사랑과 감동의 짧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었다.

이름하여 '샘터사 독서대학 가족들과 함께 한 세종대왕 100리길' 여행이다.

43년의 오랜 역사를 간직한 대한민국 대표 교양잡지 샘터사의 김성구 대표를 비롯해 서울 수도권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서대학 회원들과 손잡고 100리길을 걸었다.

천년고성 상당산성 광장에 들어서자마자 모두들 긴 탄성을 질렀다.

드넓게 펼쳐진 잔디광장, 고풍스런 남문, 이끼 낀 성곽, 소나무숲, 산성마을 호수에 쏟아지는 햇살과 바람과 한 조각의 띠배…. 그리고 막 빚은 뜨끈한 두부 한 모에 청국장과 파전은 환상의 궁합이다.

국립청주박물관은 건축양식부터 기이하지만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과 붉게 물든 정원은 대한민국 최고의 국립박물관이라며 칭찬이다.

수암골에서의 우동과 수제빵은 달달하고 구수했으며, 골목길의 풍경과 벽화이야기, 그리고 사진갤러리에서는 모두들 모델이 되어 추억을 하나씩 담느라 해 지는 줄 모른다.

바보산수화 운보 김기창 화백의 생가를 한 바퀴 돌며 한옥과 운보의 미술세계와 조각공원과 희귀한 분재 등을 바라보고 넋을 잃기도 했다. 보름달이 휘영청 떠 있는 비상리 마을에서는 개짓는 소리, 구릿빛 촌로의 장작 패는 소리, 여인의 밥짓는 소리, 서리태 까부는 소리가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더니 이내 지질박물관 정원속으로 빨려 들어가 동화같은 풍경에 젖었다. 서문시장의 청주삼겹살은 쏟아지는 육즙의 세계가 환상적이란다.

초정약수의 달차근하고 알싸한 맛은 어떠했던가. 세종대왕이 이곳에서 행궁을 짓고 요양하며 한글창제를 완성한 뒤 다양한 문화정책을 통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실천한 곳이라는 설명에 모두들 숙연해졌다.

율리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드넓고 아름답게 펼쳐져 있는 가을볕과 '책벌레' 김득신의 이야기에 감명받은 누구는 구성진 노래 한 곡조로 화답하지 않았던가.

좌구산 휴양림에서 각다분한 일상의 찌꺼기를 토해내고 대자연이 주는 피톤치드로 삶의 에너지를 얻은 뒤 천문대에서 별들의 잔치, 우주의 신비를 훔쳐보았다.

참으로 신묘한 것은 상당산성, 운보의집, 초정약수, 증평 율리 등 세종대왕 100리길은 우리에겐 일상이지만 그들에게는 낯선 설레임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 신비의 순간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느냐며 사진을 찍고, 추억을 만들고 빚는 모습들이 고마울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토록 멋진 곳이 왜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화답했다. 세종대왕이 못 다 이룬 조선의 르네상스, 이제 대한민국 청주에서 화려한 막을 열 것이다. 그 잎잎의 열어젖힘을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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