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변광섭 청주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얼음장 밑에서 두런거리는 물소리를 들어보았는가. 겨울이 깊어갈수록 봄의 전령은 꽃 피울 채비를 서두른다는데, 메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조차 궁핍한 이 겨울에 자연은 마치 수행이라도 하듯 정중동(靜中動) 봄을 준비한다. 어느 시인은 "이 얼마나 고운 아픔이랴"며 겨울 풍경을 노래했다.

며칠 전,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는 설치미술가 강익중씨가 다녀갔다. 1년에 한 번 꼴로 한국 방문을 하고, 그 때마다 만나곤 했는데, 언제나 그는 젊음과 꿈과 낭만과 우정과 애틋한 고향사랑 이야기를 보따리 풀듯 풀어놓았다. 지천명을 훌쩍 넘겼는데도 서른 청년의 모습을 간직한 것을 보면 예술의 숲에는 사람을 젊게 만드는 도파민 같은 것이 있는 것 같다.

강씨는 청주에서 태어났다. 대학을 졸업한 뒤 곧장 뉴욕으로 건너갔는데,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을 벌고 학비를 마련해야 했다. 지하철 속에서 만난 사람들의 풍경, 서슬퍼런 빌딩숲 사람들의 꿈을 엽서로 스케치하기 시작했고, 그것들을 모아 설치미술로 선보였다. 뉴욕의 지하철역에도, 유엔본부에도, 세계 곳곳의 도시 건물과 병원에도 그의 작품이 있다.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씨와 공동전시를 했으며, 상하이엑스포 한국관을 한글퍼포먼스로 연출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한국의 문화가치를 알리기도 했다.

그는 만날 때마다 방황과 번뇌로 시름겨운 내게 수많은 영감과 교훈, 삶의 에너지를 준다. 이번에는 청주시민들과 함께 21세기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문화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직지의 창조정신과 정보혁명, 그리고 세종대왕이 초정행궁에서 한글창제를 완성하고 조선의 르네상스를 실천한 역사적 가치를 시대정신에 맞는 콘텐츠로 창조하려는 것이다. 혼자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과 함께 꿈을 꾸고 빚으며 열매 맺도록, 그리하여 100년 후를 생각하고 1천년의 가치를 담고 싶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온 몸이 굳어졌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청주에서 태어나서 공부하고 직장생활을 하며 여기까지 달려왔는데, 누구보다도 청주를 사랑하고 청주를 대한민국 문화중심도시로 발전시키고 싶어 발버둥치며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나는 청주를 사랑하고 있는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지난해 늦가을 샘터사 김성구 대표와 함께 청주 일원을 투어했을 때도, 연초에 한길사 김언호·여원미디어 김동휘 대표와 시내를 둘러보았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사람들은 국립청주박물관, 상당산성, 옛 청주연초제조창, 중앙공원, 운보의집 등 처처의 문화공간이 세상 어느 공간과 견주어 보아도 훌륭하고 의미가 깊다며 그 아름다움과 가치에 넋을 잃었다. 건축가 김수근의 실험정신과 혼을 느낄 수 있는 국립청주박물관을 보라. 붉게 물든 담쟁이 잎이 건물을 감싸며 공간의 품격을 높이고, 오가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반기지 않던가. 오랜 시간의 아픔과 삶의 풍경을 간직한 상당산성, 일제와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 근현대 산업의 요람으로 한 몫 했던 내덕동 담배공장, 천년의 이야기를 품고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와 철당간과 동헌과 망선루, 그리고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크고 작은 건축물들…. 이 모든 것이 맑고 향기로운 청주정신을 노래하지 않던가.

그런데 불행하게도 청주의 공간들이 위태롭다. 오래된 건물들이 주인의 입맛대로 헐리거나 개조되면서 국적불명의 회색도시로 변질되어가고 있다. 그나마 버티고 있는 것들도 무심한 사람들에 의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사람들의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공간들이 시름시름 앓고 있으니 청주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공간을 사랑하고 가꾸며, 그 속에서 시민들이 꿈을 변주하도록 지혜를 모으는 것이 아닐까. 청주를 사랑한다면, 청주사람이라면 작은 것들에 핏대를 올리거나 자신의 욕망만을 챙길 게 아니라 공간을 사랑하는 마음부터 가져야겠다.

공간을 역사를 만들며, 사랑을 낳는다고 했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제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평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하고 배신을 일삼지 않은지 반성부터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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