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문화예술부장

피로가 누적됐는지 마음과 몸이 모두 시리고 아프다.

문득 차갑고 분주한 도시를 벗어나 삶의 여유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에 젖는다.

이 도시를 탈출하지 않으면 검은 피를 토할 것 같고, 온 몸이 찢어질 것 같다. 동해 바다에서 일출의 장관을 보며 삶의 에너지를 얻고 싶고, 서해의 이름 모를 섬에서 해풍과 함께 홀로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다.

지리산 숲속으로 달려가 밀월여행을 즐기고 싶기도 하며, 낯선 시골의 논두렁 밭두렁을 하릴없이 걷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배운 것이 도둑질이라고, 새해 첫 여행지로 군산의 근대문화유산 골목길을 선택했다.

지난해 말 부산의 감천마을, 영천의 별별마을, 대구의 근대골목, 전주의 한옥마을을 다녀왔으니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마을 순례의 종결판이 되지 않을까. 그 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내 삶의 도파민을 찾고 문화적 영감이라도 얻어오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언제나 그랬지만, 여행의 끝자락에 서면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미련과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그 짧은 여정을 글로 남기고, 사진으로 담으며, 추억으로 빚는 버릇이 생겼으니 때론 아쉬움과 삶의 여백조차도 헛되게 하면 안될 일이다.

100년 넘게 울어준 항구도시 군산. 일찍이 중국과 일본의 교역이 왕성했던 곳이고, 기름진 들판이 많아 곡식까지 풍성하니 외세의 군침에 편할 날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경제개발 계획에서 소외돼 불 꺼진 항구도시였으나, 역사는 항상 반전의 미학이 숨겨있는 법이다.

그 덕분에 일제 강점기에 놈들이 지은 창고, 세관, 은행, 상가, 관공서, 살림집 등이 고스란히 간직돼 있다.

성질 급한 사람이라면 일제의 잔상이라며 헐어버렸을 것인데, 삶이 고단했기에 마음 쓸 틈이 없었다.

해방과 함께 일본인들이 떠나고 빈 집과 건물들인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온전하게 보존되면서 요즘은 유명세를 타고 있다.

근대 서양 건축양식부터 전형적인 일본식 주택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가 다양하고 붉게 물든 아날로그 서정에 나그네의 시선과 발걸음이 머뭇거린다.

옛 군산세관은 한국은행과 함께 국내에 남아있는 3대 서양 고전주의 건축물 중 하나인데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었고 고딕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한데 뒤섞인 일본식 건축의 특징을 담고 있다. 일본인들이 이곳에서 농지를 헐값으로 매입하거나 강탈하면서 부를 축적했던 곳이 아닐까. 지금은 군산의 근대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활용되고 있다.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 해망동의 벽화마을, 화물열차 전용 철로였던 경암동 철길마을, 국내 첫 빵집의 명성에 맞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이성당, 일제 강점기 전국 최대 규모의 농장주였던 일본인 구마모토 별장인 이영춘가옥…. 이처럼 도시 전체가 근대의 건축문화로 살아 숨쉬고, 뼈아픈 상처가 실루엣처럼 아련하다.

이 때문에 지금 군산은 유목민이나 투어리스트들의 쉼표로, 영화 <타짜>와 <8월의 크리스마스> 촬영장소로, 시인 고은의 <만인보>와 소설가 채만식의 <탁류>의 창작 배경으로 인기다.

데카르트는 <성찰>에서 참되다고 믿는 모든 것들은 감각으로부터, 혹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인다고 했다.

공간은 역사를 낳고, 사랑을 낳는다는 말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공간이 있기에 역사라는 거대한 물줄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고, 그 공간을 통해서 삶과 문화와 사랑의 서사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대구의 근대문화 골목에서도, 부산의 감천마을에서도, 대전의 대흥동 골목길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청주에는 이처럼 슬퍼도 달코롬한 근대문화의 골목이 어디에 있는가. 아니, 있기는 한 것인가.

필자는 몇 해 전부터 도시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버릇이 생겼다.

아파트숲과 빌딩숲을 탈출하고 싶은 생각과 삶의 흔적을 찾아 바람슷긴 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노자는 뿌리가 없다면 늠름한 가지를 늘어뜨린 나무도 있을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은 삶의 최전선이고, 문화와 소통의 현장이고,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명한 진리의 수원지다.

그러니 머뭇거리지 말자.

청주의 공간을 청주정신으로 가꿀 채비를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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