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카페-이 영 희

부은 것이 가라앉으라고 받침대에 올려놓은 발을 보니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것 인지 안쓰러워집니다.

건강상 어려움 없이 살아왔기에 발을 다치기 전에는 발의 고마움을 알지 못하고 고운 눈길을 준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버이들이 자나 깨나 자식 걱정하고 베푸는 것을 당연시하듯, 궂은일 다 하는 발에 의미를 두지 않았습니다.

그랬는데 아문 상처 자국이 난 왼발과 깁스한 오른발을 번갈아 보면서 발은 꼭 119 구조대나 어버이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3월 중순 그날은 참으로 청명하여 산을 좋아하는 우리는 속리산으로 향했습니다. 일 년에 열댓 번은 화북 주차장에 주차하고 문장대까지 다녀오고, 대 여섯 번은 화북에서 문장대를 거쳐 법주사 쪽으로 내려왔는데 이번에는 후자를 택하기로 했지요.

전날 내린 비로 먼지 한줌 없이 촉촉한 대지에서 움 트는 봄기운을 느끼고, 상쾌한 산 공기를 마시며 콧노래를 부릅니다. 문장대에서 바라보는 산야는 매번 볼 때마다 신비롭고 산에 오는 묘미를 느끼게 하니, 세 번만 와도 극락에 간다는 속설이 생겼나 봅니다.

우리는 백여 번도 더 왔으니 극락은 예약이 됐겠지 농담을 하며 하산을 하는데, 법주사 쪽 내리막길은 응달이라 영 다른 산인 듯 돌계단 위에 잔설이 분분합니다.

아이젠으로 무장을 하고 얼마쯤 내려왔는데 왼발이 중심을 잃어 오른발에 힘을 가했나 봅니다. 지난번 경험으로 골절이라는 직감이 들어, 움직이면 안 되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지난번 다쳤던 발을 아끼느라 언 땅 위에 낙엽이 덮인 것을 모르고 밟아서 미끄러진 것이지요. 이제껏 산을 다녔어도 아이젠이 얼음에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배워야 하나 봅니다.

남편은 당황을 했는지 잠깐만 하더니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119에 신고를 하고 왔다기에 앉아서 기다리는데 30분이 지나니 몸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지나가는 등산객들이 큰 바람막이로 덮어주고, 핫 팩, 뜨거운 물, 쌍화탕을 주는가 하면 사탕도 건네며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 합니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의리에 힘을 얻습니다.

청주나 보은에서 구급차로 와 들것을 가지고 이곳까지 오려면 한 시간은 더 걸릴텐데 눈에 보일 정도로 몸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한 등산객이 저체온증을 예방하려면 끌어안는 게 효과적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지난번 폭설이 내려 경주에서 아까운 청춘들이 재난당했을 때 지그문트 바우만이 예리하게 갈파한 '유동하는 공포'가 생각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불안 공포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공포는 어두운 거리에도 있고 빛나는 텔레비전 화면 안에도 있으며, 우리 집에도 일터에도 공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선진국에서도 후진국에서도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어, 불안과 공포마저 세계화된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라고 했는데 그것을 그냥 지나가는 말로 치부하고 잠시 방심을 한 벌을 받은 셈이지요.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벌써 헬리콥터가 출동한다고 위치를 정확히 묻는 휴대폰 교신이 시작되었습니다. 아까 내려갔다 와서 냉천골 휴게소 200m 위라고 말하는 남편이 더 지혜로워 보이고 이제 살았구나 싶어 탄성이 나옵니다. 동시에 주말을 즐기려다 헬리콥터까지 출동시키게 되니 얼굴이 화끈거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습니다.

잠시 후 높은 곳에서 빙빙 도는 헬리콥터에 모자를 흔들자, 주변의 나뭇가지가 다 부러지고 모자가 날아가면서 119 구조대원이 줄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응급조치를 하고 구명 낙하산 같은 안전벨트를 매더니 줄을 꼭 잡으라 합니다. 줄을 타고 올라가며 내려다보니 그 순간을 찍는 등산객들이 보여 자라목같이 움츠러듭니다.

드디어 헬리콥터에 안착하고 뒤이어 구조대원이 복귀했습니다. 다들 쉬거나 레저 활동을 하는 주말에 긴급 출동하여 생명을 걸고 어리석은 등산객을 구해준 그분들께 죄송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명함이라도 챙겨 다음에 감사한 인사를 하려 했지만 도리어 위로를 받아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정원 때문에 배낭 두 개를 짊어지고 하산할 남편한테도 미안한 마음이 드는데, 어느새 잔디밭에 착륙하고 구급차로 이송을 합니다.

평소에도 위험한 순간에 혼신의 힘을 다하는 119 구조대를 보며 이타적인 사명감으로 무장한 훌륭한 분들 이구나 감동했는데, 신속한 도움을 받고 보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3금 중 소금, 지금 만큼이나 소중한 수호신 같은 분들이라 생각합니다.

왼발을 다쳤을 때 인간은 산에 의해 넘어지지 않고 작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는 진리를 체험하고서도, 방심한 우매함이 바쁜 119에 신세를 지게 했습니다. 지난번 작은 철심을 넣었다기에 얼마나 철이 없으면 인위적으로 철이 든 여자가 됐나 웃으며 그것을 소재로 한 '철이 든 여자'를 썼었지요. 철심을 제거한 후 한 동료는 철이 든 여자보다 철없는 여자가 더 좋다고 해서 또 한 번 웃었었는데.

"세상에는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는데 신(神), 인간의 어리석음, 웃음입니다. 앞의 두 가지는 우리 인식의 범주를 벗어나니 웃음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합니다"라는 존 F 케네디의 말을 유머 강사들은 잘 인용하는데, 119가 출동할 상황을 만든 것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반세기가 넘는 삶을 살고서도 문리가 트이지 않아 주위 분들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불편하게 함이 부끄럽습니다. 이제껏 범생이로 살아왔으니 9회 말에 멋진 홈런은 치지 못해도, 슬기롭게 잘 버텨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같은 병실의 환우가 "북한산 등반하던 한 등산객이 해빙기 낙석에 유명을 달리했다"는 9시 뉴스를 보며 불행 중 다행이라고 위로를 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바쁜 119 구조대에 폐를 끼치는 민망함이 없도록, 역동적인 삶에서 삼가고 조심하는 삶으로 전환해야 할 시점입니다. 줄달음질 쳐 온 자신감에 잠식당한 착각이 오늘의 나를 만든 원동력이 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지켜가야 할 때입니다.

오늘이 살아있는 날들 중에 가장 젊은 날이라는 것은 중년에게 오늘만큼만 건강을 유지해도 좋다는 메시지의 다른 말이랍니다. 깁스를 풀면 그날의 수호신 119 구조대에 존경심을 담은 인사를 정중히 하고, 쓴 소주 한 잔이라도 대접 하고 싶다는 소망을 봄바람에 실어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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