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보훈의 달 기획 - 민초들 불꽃처럼 일어났지만 …

청주시 상당구 수동 삼일공원. / 신동빈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또한 1일은 '의병의 날'이다. 조선시대 각종 왜란과 호란을 거쳐 일제시대까지 의병은 전국 각지에서 나라를 위해 '결사항쟁'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의병활동이 바로 '항일의병'이다. 109년전 대한제국이 일본에 의해 실질적으로 국권을 침탈 당한 을사늑약(1905년)이 체결된 치욕적인 날이기도 하다. 의병의 날은 국가 기념일로 안전행정부가 주최하는 정부차원 행사다. 정부는 지난 2011년부터 6월 1일을 의병 국가 기념일로 제정했으며 올해가 4회째다. 이에 충북 항일의병 투쟁사를 비롯해 항일의병 역사기록 현실, 전문가의 견해 등 3차례에 걸쳐 알아본다. / 편집자

'을사늑약'을 아는 사람은 많아도 '의병의 날'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1884년 일제는 그들 앞잡이 내각을 세우려고 갑신왜란(甲申倭亂)을 일으켰고, 10년 뒤 일본공사는 군대를 이끌고 경복궁을 침범해 기어이 그들 앞잡이 내각을 만든 갑오왜란(甲午倭亂)을 일으켰으며, 1895년에는 일본군경과 자객들이 궁궐로 쳐들어와서 왕비를 참살하고 불에 태운 후 후원에 묻어버린 만행이 을미왜란(乙未倭亂)이요, 10년 뒤 일본군이 궁궐을 에워싼 채 우리나라에 일제 통감부를 설치하는 강제 조약을 체결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해 주변 열강으로부터 조선의 패권을 인정받은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고종의 뜻대로 된게 아니라 일제의 계략으로 인해 강압적으로 체결된 조약이다.

을미왜란 이후 일제의 만행에 '국모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상소와 격문이 나붙기 시작하더니, 문석봉(文錫鳳)이 충남 유성에서, 평안도 강계에서 김이언(金利彦)·김창수(金昌洙 김구 선생의 본명) 등이 '국수보복(國讐報復)'을 기치로 의병을 일으킨 의병투쟁이 국권회복기 전기의병이다.

을사늑약에 이어 고종의 강제 퇴위, 군대 해산 등 국권이 무너져 가는 것을 보고 '국권회복(國權恢復)'을 위해 또다시 궐기한 의병활동이 후기의병이다. 그러나 항일 의병들의 무기는 겨우 화승총에 불과했으며, 책을 읽던 양반·유생이나 농기구를 만졌던 농민들로 구성된 의병들이 조직적인 훈련과 신형 무기를 갖춘 일본 군경을 상대한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었다.

흔히 구한말이라고 하는 국권회복기에 경상도·전라도·충청도 의병들이 모여 전주 덕유산 자락으로 몰려들었다. 무주, 용담, 장수, 지례, 대덕, 금산, 영동, 황간, 거창, 안의 등지에서 격렬한 의병투쟁을 전개했던 역사를 간직한 곳이 바로 덕유산 자락이다.

주요 의병투쟁지를 살펴보면, 경남 거창의 어인동·황산·지경령, 안의의 대황령·우전촌·신평·덕동·월성·영각사, 경북 지례의 임계·갈계·청암사·덕산·평촌·예영동, 충남 금산의 심천리·부북면 등지, 충북 황간의 물한리·원촌리, 영동의 양내면 일대와 이원역, 전북 무주의 무풍장·삼공리·현내리·설천동·철목·한치·안성·칠연계곡·진도리·원통사, 용담의 노채리·작월리·수철리·조림·괴목정, 장수의 장계장·어전·양악동·옥곡·쌍암리·이문성 등 수천 명이 국권회복을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을사늑약의 내용이 알려지자 반대투쟁이 전국 각지에서 활발히 벌어졌다. 일부는 자결로서 항거했으며, 일부는 의병을 일으켰다.

충북의 보재 이상설 선생을 비롯한 3인을 헤이그에 밀사(密使)로 파견해 을사늑약이 강압에 의한 무효임을 알리는 외교 활동도 전개됐다.

충절공 민영환은 대궐 앞에 소청을 차려놓고 상소를 올렸으나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자 2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을 남기고 자결했다.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신료들의 상소와 죽음이 이어졌다. 또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일제의 총칼에 비참히 죽음을 맞이했다.

충북은 일제강점기 항일무장 독립운동의 뿌리가 된 대규모 항일의병의 근원지였지만 아직도 관련 연구는 빈약하기만 하다. 역사 속으로 잊혀져가고 있는 충북 항일의병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요구되고 있다. / 이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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