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세평] 이종수 시인 흥덕문화의 집

아들이 어렸을 때 도토리 일기를 쓴 적이 있다. 도토리 한 알에는 아름드리 나무가 될 유전자, 아니 뜻이 잠재되어 있다는 말은 놀라운 발견이나 다름없었기에 아이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기록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림책에서 도서관으로 산천으로 돌아다니며 아이의 말과 몸짓 하나 하나를 받아 적는 것이었다.

그것은 둘째 아이를 낳아 기를 때도 이어졌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도토리를 우주 삼아 싹이 오르고 가지와 잎으로 나무됨됨이를 갖추어가던 때였으므로 아이 숨소리와 뱉어내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시였다. 어느 날 월악산 영봉이 보이는 산길을 같이 걸어가다가 이대로 하늘 끝까지 걸어가도 되겠다는, 아니 이 순간의 절정을 맛보고 죽는다 해도 아까울 게 없다는 삶의 진경을 보았을 때, 도토리에 아름드리 나무가 깃들어 있다는 말을 실감했더랬다.

참으로 이상한 체험이었다. 아이의 참 얼굴을 본 것이다. 그 어느 것도 내 마음대로 이끌지 않고 아이의 참 얼굴로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래서 어찌 어찌 도토리 일기를 모아 '요놈이 커서 무엇이 될꼬' 하는 제목의 책을 낸 적도 있다. 아직도 그 때 이야기를 들춰보다 보면 내 팔목에 애기똥풀로 이름을 써 주며 환하게 웃는 아이 얼굴이 겹치면서 맑은 바람이 불어오는 느낌을 받는다.

지난 4월 16일 이후 줄곧 우울했다. 도토리 일기는 사춘기와 성적을 걱정하기 시작하면서 흥미를 잃고 말았기에 아이의 참 얼굴을 본 적이 얼마나 있었던가, 하는 자괴감과 함께 선거철이 끝나는 때까지 장복하고 있는 약처럼 입에 쓴 이야기로 남아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어야겠다. 무엇보다 교육감을 뽑는 선거에 어느 후보가 내 건 구호에 나왔듯이 이제 더는 편을 가르는 교육이어서는 안 된다는 학부모들의 뜻이 들어있는 결과를 마치 아이들의 장래를 망칠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아이들의 죽음을 잊지 않겠다고 말하던 진심을 무엇인지, 지금이라도 아이들의 참 얼굴로 바라보고 불러주어야 할 때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답답하고 부끄러웠던 것이다.

어두운 교문 앞에서 밤늦게 끝나는 아이를 기다리며 수없이 묻는다. 천둥치고 번개치는 까만 밤 하늘을 칠판 삼아 써본다. 아직도 서슬 푸른 저들의 야만스런 의회와 정치 권력 앞에 만만한 교육 소비자로서 성적순으로 아이를 매기고 남을 짓밟고 저 높은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것은 제대로 된 사유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사유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다, 나쁘게 돌아가는 힘이 어떻게 사유하는 것인지 알아야 하고 대안을 세워야만 너무나 참담하고 무시무시한 세기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세기가 될 것임을. 그래서 일찍이 러시아의 시인 오시프 만델스탐은 '세기를 그의 감옥으로부터 끄집어내기 위하여,/새로운 세계를 시작하기 위하여,/관절이 굳어버린 하루하루의 무릎들을/피리가 하나로 모아야만 하리/그렇지 않으면 세기가/인간의 슬픔을 따라서 물결을 휘젓고,/풀 속 살무사가 세기의 황금 리듬에 맞추어서 숨을 쉬리라.'하고 썼던 것이다.

이 땅의 도토리와 도토리에 잠재된 꿈을 위해서라도 참 얼굴로 바라봐 주고 불러주는, 참된 것을 활기 있게 하는 일(알랭 바디우)이 중요하다는 말을 다시 한 번 되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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