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세평] 이종수 시인·흥덕문화의집 관장

연풍성지 옆댕이에 노량해전을 끝으로 퇴역한 이순신 장군이 서 있다. 여기는 소싯적에 그림 잘 그리기로 이름난 김홍도 화백이 벼슬살이를 했다고도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고 천주교 박해와 관련이 있는 성지이기도 하여 여럿 눈물과 얽혀있는 곳이어서 이순신 장군은 뒤미쳐 글줄이나 읽다가 분연히 일어선 백의종군 의병 같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이 적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은 한편 조정에도 죽음을 알리지 않고 연풍에 들어오신 까닭은 눈물 없이는 들고 날 수 없다는 오지였기도 하였으리라. 장군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신유박해와 굳이 연관을 짓자면 한양으로 붙들려 가던 천주교 신부님들이 신자들을 모아놓고 너럭바위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실 때 감읍하여 몇 번은 풀어주고 싶었을 어느 관군의 벙거지처럼 생긴 투구를 쓰고 허연 수염을 늘어뜨리고 눈매는 시골 유학자의 눈처럼, 뒤늦게 장사의 길로 들어선 허생의 눈처럼 사람 좋은 후덕함이 묻어나서 도저히 장군으로 못 보겠는, 그런 퇴역 장군의 모습을 하고 서 계시는 것이다.

독자 여러분, 거짓말도 이 정도면 돌 맞을 수준이라고 하시겠다. 굳이 왜 이런 거짓말은 하게 되었느냐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렇다. 아주 한가한 어느 월요일, 어찌 하다 연풍에까지 흘러들었는데, 연풍성지 우람한 성당 앞으로 흐르는 냇가에서 만난 장군의 동상 때문이다. 세월이 흘러 시멘트 동상은 강골의 처음 기세는 어디 가고 뭔가 퇴역 예비군의 냄새가 나기 때문일까. 퇴역 장군이 예비군 훈련장에 나타나면 으레 그랬을 만큼 후덕해지고 느슨해진 세월 탓이거니 해본다. 더 정확히 말씀 드리자면 한때 높으신 자리에 있던 분들이 진짜 명예와 권력 끄나풀까지 내려놓고 진짜 백성이 되고 시민이 되는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기 때문에 세월이 만든 저 시골 서당 선생님 같은 모습에서 장군을 얼비쳐서 생각한 탓이기도 했으리라. 장군의 진짜 마음은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면 이렇게 먼 연풍으로 들어와 하늘 천, 따지를 읊조리다가 논어, 예수, 맹자, 마호메트, 장자, 노자로 이어지는 진짜 공부를 하면서 이웃 사람들과 섞여 들어가는, 그러다 촛불을 켜고 일어나야 할 만큼 나라의 큰 일이 있으면 백의종군 하는 마음으로 분연히 일어나서 "내 한때 열두 척 배로 대함대를 물리친 이순신인데 이러면 안 되는 거제, 혼자만 잘 살믄 뭐 하는겨"하며 어느새 이곳 사투리까지 몸에 밴 어른다운 소리를 내놓을 수 있는, 그래서 더 쩌렁쩌렁하고 실감 나는 평전을 보여주는 위인을 보는 꿈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느 시인의 시에 왕이 왕관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왕관이 왕을 내려놓는다는 대목이 있다.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처럼 더 욕보이기 전에 내려와야 하는 인물들과 함께 진짜 백성으로 돌아와 시민으로 돌아와 초야에 묻혀 이웃이 될 수 있는, 몇 번의 총리 제안이 있었으나 내 귀만 더럽혔느니 하며 삼고초려마저 미색케 하는 진짜 강골의 정신을 보고 싶은 것이다. 그저 시민이자 백성인 것을 자리에 연연해하고 누리면서 어떻게든 해 먹으려고 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이다. 재임 기간내 꼭 한 번은 삐뚜름하게 투구를 쓰시고 허연 수염을 날리며 웃고 계신 연풍 이순신을 꼭 보시라. 내려놓는다는 말만큼 어려운 말이 없고 정의가 와 진실이 아니면 다시 분연히 일어나 말할 수 있는 딸깍발이 정신은 꼿꼿하게 가지고 계셔야만 백성들을 굽어 살필 수 있다고 간곡하게 말씀 드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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