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교황의 길을 찾아서] ④충북의 성지-괴산 연풍순교성지와 제천 배론성지

충북 괴산에 있는 연풍순교성지는 신앙의 길목이면서 박해를 피해 은신처를 찾는 순교자들의 피난처로 이용됐다. 1968년 한국천주교 103성인(聖人)에 속하는 황석두(黃錫斗, 1811~1866) 루카 성인의 고향이 연풍으로 드러나면서 개발이 시작됐고 1984년 성역화 됐다. 제천 배론성지는 성지가 들어선 지형이 배 밑바닥과 비슷하다고 해서 '배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는데 천주교 박해시대 교우촌으로,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黃嗣永, 1775~1801)이 신유박해를 피해 머무르며 백서를 썼던 곳으로 유명하다. / 편집자



연풍은 초기 천주교회 때부터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뿌리 깊은 곳으로 마을 곳곳마다, 이화령과 문경 새재를 잇는 구석구석마다 신도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연풍순교성지 인근에는 길이가 서로 다른 도보 성지 순례길이 마련돼 있기도 하다.

연풍의 복음역사는 1866년에 흥선대원군이 일으킨 병인대박해로 인해 피의 순교사로 변화하게 되는데 교우들은 연풍 관아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아 죽임을 당하거나 도살장이라고 불렸던 연풍 옥터로 끌려가 목숨을 바쳐야 했다. 바로 그 도살장 위치에 연풍 성지가 자리하고 있다. 지금도 연풍성지에는 신자들을 처형할 때 썼던 '형구돌'이 있는데 직경이 약 1m, 둘레가 4~4.5m 정도 크기인 형구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천주교 신자들을 구멍 앞에 세운 다음, 목에 밧줄을 걸고 반대편에서 잡아당겨 죽이는 잔혹한 교수형 형구다.

신앙의 길목이자 교차로면서 황 루카 성인의 영원한 안식처인 연풍. 현재 연풍에서는 황석두 루카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성당 신축이 한창이다.


#신앙의 길목·순교자들의 피난처 '연풍'

괴산군의 남동쪽 끝에 있는 연풍. 백두대간의 조령산, 백화산에 둘러싸인 이곳은 조선 후기 천주교 신도들이 박해를 피해 은신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곳이었다. 박해가 계속되던 시절, 신앙을 지키려던 신도들은 문경 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로 피신하거나 밤을 틈타 험준한 소백산맥의 산 속으로 숨어들었다.

최양업(토마스)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 칼래(강 니콜라오) 신부도 연풍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면서 교우촌을 순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신부들은 연풍 골짜기에 숨어살던 교우들을 방문해 비밀리에 성사를 주었는데 이때 연풍은 경상도와 충청도의 신앙을 잇는 교차로가 됐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는 수많은 교우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연풍순교성지는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연풍 병방골,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이기도 하다. 부친이 천주학을 버리든지 작두날에 목을 맡기든지 하라고 강요하자 결코 진리를 버릴 수는 없다며 작두날에 목을 디밀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후 성인은 아내와 동정 부부로 살면서 일생을 교회에 헌신하다가 병인박해 때 다블뤼(안돈이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오 베드로)와 위앵(민 루가) 신부, 장주기(요셉) 회장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당한다.

군문효수형은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 형벌의 일종으로 조선시대 대표적인 군문효수장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톨릭 신부,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처형된 '새남터'가 있다.

성인의 시신은 갈매못에서 홍산 삽티(부여군 홍산면 상천리)를 거쳐 고향 병방골로 이장됐고 오랜 노력의 결과, 1979년 묘소를 발견해 3년 뒤 연풍 성지로 천묘한다.

#조선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평신도 회장

부유한 양반집 선비였던 황루카는 19세가 되던 1832년 임진년, 스승 이학규(1770~1835)로부터 천주교를 배우고 21세에 입교했다. 부친의 엄격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3년 동안 벙어리 노릇을 하며 집안 식구들을 모두 영세시키는데 성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1845년 조선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페레올)이 속성 수업으로 황루카를 신부로 승품시키려 했으나 교황청은 황루카 부인이 몸담고 있는 종신 헝●의 수녀원이 없어 허락하지 않았다.

작두날로도 막지 못한 황 루카 성인은 일생을 교회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고 한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그를 회장으로 임명해 곁에 두었는데, 주요 역할은 선교사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치는 교사였다. 선교사들의 교우촌 순방에 함께 했으며 다블뤼 주교를 도와 한글 교리서들를 편찬하기도 했다.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는 황석두 루카 성인을 두고 "조선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이라고 극찬했다.

성인은 주교가 체포됐다는 소식에 포졸들에게 자수를 하게 되는데 서울로 압송되는 과정에서도 포졸과 구경꾼들에게 교리를 설명할 만큼 순교의 용덕을 보여준 것으로 유명하다.

구름마저도 쉬우가는 험지, 박해를 피해 모여든 민초들의 본향은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연풍현이었지만 지금은 행정구역이 충북 괴산군 연풍면으로 바뀌었다.

연풍순교성지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것은 다섯 성인상과 반석이다.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한 다블뤼(안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올 베드로) 신부, 위앵(민 루가) 신부, 황석두(루카) 회장, 장주기(요셉) 회장 등 다섯 성인과 성인들이 서울로 압송될 때,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갈매못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쉬어갔다는 반석이다. 당시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회장이 이 반석 위에서 구경꾼들과 그들 사이에 숨어 있는 신자들에게 천주의 진리를 강론했는데, 포졸들조차 그 위엄에 눌려 감히 이를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 한국 천주교 전파의 진원지 '배론'

배론성지는 그 위치가 배 밑바닥처럼 깊다고 해서 배론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많은 신도들이 배론으로 숨어들었고, 옹기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배론성지의 로고는 배론의 역사성을 잘 말해준다. 배론성지 로고는 십자가의 수난을 출발로, 역사의 땅, 성소의 땅, 배움의 땅, 거룩한 땅을 의미한다고 한다. '배론성지'라고 쓰인 두루마리는 황사영(알렉시오) 순교자가 배론 토굴에서 정성으로 썼던 백서(帛書)를 상징하는데, 성지 입구에 있는 돌 이정표에 새겨진 초대교구장 지학순(다니엘) 주교의 친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십자가 뒤의 주황색 후광은 자신의 집을 최초의 신학교로 사용할 수 있게 한 성 장주기(요셉)을 표현했다. 성소의 땅을 상징하기도 한다. 진한 주황색은 십자가로부터 찬란한 빛으로 드러남을 뜻한다고 한다.

주황색 바깥의 오렌지색 후광은 성 남종삼(요한) 성인을 기리는 상징인데, 배론성지 인근 '묘재'에 순교자 남상교(아우구스티 노) 유택지가 있다. 오렌지 색은 십자가로부터 세상을 성화시키고 천국을 그리게 한다는 의미이며 녹색의 배모양과 십자가는 한국인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땀의 순교를 드러내고 있다.

초가집으로 된 배론 신학교는 병인박해로 문을 닫기 전까지 신학생들이 서양학문과 신학을 공부했던 곳으로 쓰였다. 신학교 뒤에는 황사영 신부의 토굴이 있어, 이 토굴에서 박해 상황과 천주교도의 구원을 요청하는 백서를 집필한 것으로 전해진다. 황사영이 쓴 백서 원본은 1925년 시복식(諡福式, 가톨릭에서 성덕이 높은 이가 선종(善終)하면 일정한 심사를 거쳐 성인(聖人)의 전 단계인 복자(福者)로 추대하는 것) 때에 뮈텔주교가 교황 비오 11세에게 건네 현재 바티칸 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배론성지는 충북 제천에 위치해 있지만 1958년 원주교구에 속하게 되면서, 원주교구장이 개발에 착수해 성지 일원을 단장했다. / 기획취재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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