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교황의 길을 찾아서] ③충북의 성지 진천 배티성지

진천 배티순교성지는 최양업 신부의 사목 중심지였고, 순교자들의 본향이기도 하다. 충청권 최초로 천주교 신자들의 비밀신앙공동체인 교우촌이 형성됐고, 한국 최초의 신학교가 있던 곳이 바로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의 배티순교성지다. 특히 배티 성지와 인근에는 유명·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는데, 배티 '6인 묘'와 '14인 묘' 등 이름 없는 들꽃처럼 살다가 신앙 때문에 순교한 선조들의 줄 무덤이 유명하다. / 편집자

배티순교성지는 충북 진천과 경기도 안성 경계의 깊은 산골인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위치해 있다.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지만 서울·경기·충청·경상지역으로 쉽게 연결돼 있어 1830년부터 천주교 신도들의 피신처가 형성됐다.

배티는 동네 어귀에 돌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최양업 신부는 오랫동안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전국을 다니며 사목활동을 했다. 1년에 5천리에서 7천리까지 걸어 다녔고, 심할 때는 한 달에 나흘밖에 잠을 못 잤다고 하니 '길에서 살았고, 길에서 하느님을 만났다'는 표현이 낯설지 않다.


배티는 1866년 병인박해, 1868년 무진박해 때 50명의 순교자를 냈는데 지금도 순교 흔적과 순교자의 무덤이 널려 있다. 인근 안성에는 미리내 성지가 있고, 양지에 골배 마실과 은이 공소 터가 있다. 천주교 청주교구는 배티순교성지의 네 가지 영성을 천주교 신자들의 비밀교우촌, 최양업 신부의 땀과 신앙이 어려 있는 곳, 한국 최초의 신학교(가톨릭 대학의 효시), 순교자들의 본향이라고 설명했다. 배티순교성지에서 처음 마주하게 되는 성당은 '최양업 토마스 신부 선종 150주년'을 기념해 건립된 성당으로 우뚝 솟은 종탑과 화려한 장미창을 가진 고딕양식을 하고 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일대기와 성 장 베르뇌 시메온 주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표현한 스테인드글라스 공간이 인상적이다.

# 비밀 교우촌과 신학교 마을

한국 천주교회가 100년 박해를 받는 동안, 신도들은 척박한 산간지대로 들어가 몸을 숨긴 채 살아가게 된다. 그 시절 배티 골짜기와 산 너머 이곳저곳에 비밀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1837년 5월 모방(나 베드로)과 샤스탕(정 야고보) 성인 신부들이 성사(聖事, 가톨릭교회에서 신자들에게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 주는 종교의식)를 준 곳도 배티 교우촌이었다. 그 결과 배티 교우촌은 기록에 나오는 충청도 최초의 공소(公所, 본당보다 작은 천주교의 단위교회.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지역신자들의 모임)가 된다.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를 거쳐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교우촌 수는 더욱 늘어나게 되고 이름이 있는 교우촌만 배티·삼박골·은골·정삼이골·용진골 등 15곳이나 됐다.

윤병의(바오로) 신부의 박해소설 '은화(숨은 꽃)'의 주요무대도 배티였다. 한국 천주교회의 카타콤브(Catacomb, 로마 초대교회 박해시대 신자들의 신앙 중심이 된 지하 묘소로서 세계적 순례지로 알려져 있다)로 지칭되는 이곳에서 신자들은 하늘을 가린 나무와 구름이 박해자들의 눈과 귀를 가려주도록 기원하며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구고, 숯가마를 운영했다.

배티성지의 영성 가운데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라는 역사적 의미도 자리하고 있다. 1850년, 다블뤼(안 안토니오) 성인 주교가 신부였을 때, 교구장 페레올(고 요한) 주교는 '조선교구 소신학교' 설립을 명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배티 교우촌 안에는 작은 성당 겸 사제관을 겸한 신학교 교사가 마련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배티 교우촌 안에 자리한 방 두 칸짜리 초가집이다. 최양업 신부는 1853년 여름까지 배티에 상주하다 교우촌 순방에 나선 다블뤼 교장 신부의 바통을 이어 신학교를 맡게 되고, 1864년까지 신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유학을 돕는다. 최양업 신부의 지도로 1854년 3월에는 임 빈첸시오, 김 사도 요한, 이 바울리노 등 신학생 3명이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나기도 했다. 이후 배티 신학교는 문을 닫았지만 초가집으로 된 성당 겸 사제관에는 최양업 신부, 프티니콜라(박 미카엘) 신부,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 등이 오랫동안 거처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최양업 신부와 순교자들의 본향

'이름 없이 들꽃처럼 살다 간 선조들의 순교신앙과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숨결이 가득한 땅' 많은 사람들이 배티성지를 일컬어 이렇게 설명한다. 배티성지를 비롯한 인근에 유명·무명 순교자들의 묘소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순교자 묘소만 인근에 28기에 달한다. 배티 고개 아래에 있는 무명 순교자 14인의 묘를 비롯해 배티 성재골에 있는 무명 순교자 6인의 묘, 이월 새울 공소에 있는 이 스테파노 순교자 1기, 배티 삼박골의 이호준 요한 아내와 딸 순교자 2기, 백곡 공소의 박 바르바라와 시누이 윤 바르바라 순교자 2기, 옛 성당 터와 은골에 위치한 유 데레사와 남편 순교자 2기, 진천읍 사석리에 있는 오반지(바오로) 1기 묘소가 그렇다. 천주교회 박해기에 배티 일대에서 체포된 순교자 수만 34명에 이른다.

최양업 토마스(1821~1861) 신부는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면서 두 번째 사제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순교자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제가 되어 귀국한 뒤 선종하는 순간까지 12년 동안 한 달에 나흘 정도 잠을 자고, 숨어 사는 신도들을 찾아 1년에 7천리를 걸어 다니며 조선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것으로 전해진다.

1836년 중국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그곳의 신학교와 필리핀의 마닐라, 만주 소팔가자 등을 전전하며 사제의 꿈을 키웠다.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상해에서 사제품을 받은 이후 요동의 차구 성당(현 요녕성 장하시 용화산진)에서 7개월 동안 사목활동을 하다가 귀국했다.

경기도·충청도·전라도·경상도·강원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순방하기 위해서 길에서 살다시피 했으며, 배티 교우촌을 사목 중심지로 삼았다. 최양업 신부는 과로에 장티푸스로 쓰러져 1861년 6월 15일 만 40세의 나이에 선종하게 되는데 시신은 진천 공소에 가매장됐다가 같은 해 11월초 배론으로 옮겨져 안장됐다. 하지만 최양업 신부는 목숨을 바치는 순교를 하지 못했고, 시복시성(諡福諡聖, 가톨릭에서 순교를 했거나 특별히 덕행이 뛰어났던 사람들에 대해 사후 복자(福者)·성인(聖人) 혹은 성녀로 추대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자발적 기도와 현양운동이 전개중이다. 최양업 신부는 배티 사제관에서 여러 편의 '천주가사'를 짓고, 최초의 한글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와 한글교리서인 '성교요리문답'을 지었다. / 기획취재팀


'순교박해의 기록' 최양업신부박물관

최양업신부박물관은 성당 좌측에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 외관은 최초의 조선교구 신학생인 최양업, 김대건, 최방제 3인이 유학했던 마카오의 조선교구신학교, 즉 파리외방전교회의 극동 대표부 건물을 모티브로 삼았다. 또한 당시부터 현재까지 마카오 신학교(대표부) 인근에 위치해 있는 안토니오 성당의 외관도 실제 비례에 맞춰 박물관 외관의 설계와 시공에 적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물관은 모두 3개의 전시실로 구성됐다. 교회 설립 이전부터 신앙의 자유를 얻기까지 내용과 배티순교성지의 역사를 연대기적으로 설명한 제1전시실(한국 천주교회사),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생애와 관련해 서적과 유물을 전시한 제2전시실(최양업 신부의 생애), 1849년 최양업 신부가 사제품을 받고 귀국한 뒤 1861년 선종할 때까지 걸었던 12년 9만 리의 고달픈 열정을 느낄 수 있는 제3전시실(사목 활동 체험) 등이다. 전시실 2층 한 켠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과 시복식을 위한 기도문, 4박 5일간의 충청 방문 일정이 소개돼 있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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