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크리스마스 교황의 길을 찾아서]②충북의 성지 음성 꽃동네와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

프란치스코 교황이 충북 음성의 꽃동네를 방문하겠다고 결정한 것은 꽃동네 장애어린이들 때문이다. 핏덩이인 채로 한 번, 정상적으로 입양되지 못해 또 한 번 버려진 가장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알려졌다. 교황은 가난한 자 중에서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자 중에서 가장 소외된 이웃을 먼저 사랑해야 한다는 교회의 참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꽃동네를 선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편집자



'빌어먹을 힘만 있어도 주님의 은총'이라고 쓰인 꽃동네, 그리고 인근에 위치한 117년 역사의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감곡성당)을 찾은 것은 초여름이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한국 방문 일정 가운데 8월16일 충북 음성의 꽃동네를 찾는다. 오후 4시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꽃동네에 머물며 장애인들과 한국 천주교 수도자들,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지도자들을 만나게 된다.

충북지역 주요 성지를 다녀보면 교황의 충북 방문을 축하하는 플래카드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일어나 비추어라"(이사 60,1)라고 쓰인 문구가 꽃동네를 비롯한 방한 방문 주제다. 소주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

프란치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에는 청주교구 신자 1만여명과 꽃동네 회원 1만3천여명이 함께 할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장애아동을 비롯한 꽃동네 가족 170명, 한국 천주교 수도자들(수사 422명, 수녀 3천859명), 한국 천주교 평신도 지도자 153명이 함께 하게 된다.

천주교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선교사목국장)는 청주주보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교황님께서는 가장 가난한 이들, 어머니로부터 일차적으로 버림받고, 사회로부터도 이차적으로 버림받아, 두 번씩이나 버림받은 장애아동과 장애인들을 만나기 위해 꽃동네를 방문하십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는 또 염수정 추기경의 말을 인용,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시고 그들을 위로하시는 교황님의 모습에서 우리를 위해 낮은 곳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모습에서 우리는 '희망'을 얻습니다. 그 희망은 주님께서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일깨워줍니다"라고 전했다. 서철 바오로 신부는 "교황님은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에 대한 교회의 사랑을 재정립할 뿐 아니라, 한국사회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좋은 계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꽃동네가 위치한 음성에는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과거 장호원 성당으로 불렸던 곳이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피신했던 육촌 오빠 민응식의 집이 있던 곳으로,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육촌 오빠인 민응식이 서울로 압송된 후에는 의병들이 점거해 사용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일본군의 공격을 받게 되고, 방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고 말았다. 임가밀로 신부는 이듬해인 1896년 5월 성모성월에 집터와 산을 매입, 매괴성월인 10월 7일 본당을 설립하게 되는데, 지금의 고딕식 성당을 건립한 것은 1930년의 일이다.

본당설립까지의 과정을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에서는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초대 본당 임가밀로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93년 서품을 받은 후 바로 입국해 다음 해인 1894년 첫 본당으로 유서 깊은 교우촌, 신학당이 있었던 여주 부엉골에 부임한다. 하지만 본당 사목지가 북쪽 끝이고 산지 부락이어서 본당 이전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고, 사목 방문차 여주를 지나 장호원에 이르렀을 때 산 밑에 대궐 같은 집을 보고 이곳이 본당 사목지로 적합하다고 직감하게 된다.

기록에 따르면 임가밀로 신부는 "성모님 만일 저 대궐같은 집과 산을 저의 소유로 주신다면 저는 당신의 비천한 종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주보가 매괴 성모님이 되실 것입니다"라고 기도했다. 부엉골로 돌아가서도 매괴 성모님께 끊임없이 청하였으니, 결국 간곡한 청이 현실이 되면서 임가밀로 신부는 처음 기도대로 감곡본당을 성모님께 봉헌해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이 됐다고 전해진다.

웅장한 모습의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은 당초 명동성당과 쌍둥이 성당으로 지으려고 했지만 여러 사연으로 명동성당보다는 작게 지어졌다고 한다. 성당 입구 옆에는 성모님께 바치는 청원기도를 적는 장소가 마련돼 있다.

임가밀로 신부의 동상과 메시지도 인상적이다. 51년 동안 감곡본당에서 사목생활을 했던 그는 1947년 10월 25일 세상을 떠나며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평소에는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라는 말을 자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메시지는 지금도 감곡매괴성모순례지성당을 찾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매괴박물관에서는 하나의 신발로 50년을 생활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검소한 생활을 했다는 임가밀로 신부 이야기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쏜 총 일곱발을 맞고도 부서지지 않은 성모상의 사연을 접할 수 있다. 이 성모상은 온갖 수난을 겪었다고 해서 '칠고의 어머니' 또는 '매괴의 어머니'로 불린다.

매괴 쉼터를 지나 계속 올라가면 산상십자가가 있다. 성당은 1996년 1월 5일 충북유형문화재 199호로 지정됐으며, 2002년 10월에는 유물관이 개관했다. 1914년 국내 첫 성체 거동 때부터 사용했던 성광과 금색 제의, 영대, 구두 등이 있고, 정약종(丁若鍾, 1760~1801, 아우구스티노)이 지은 '주교요지(主敎要旨)'와 같은 문서류, 감곡성당의 역사를 개괄한 각종 사진을 관람할 수 있다. 문화재로 지정된 대성당을 비롯해 충청북도 최초의 석조건물인 매괴박물관, 역사적인 서적과 귀중한 가톨릭 유물 등이 감곡성당을 방문하는 이들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 기획취재팀



▶수난받은 매괴 성모상

매괴 성모상은 루르드에서 제작했다. 1930년 대성전 건립 당시 제대 중앙에 안치되었다. 한국전쟁 때 성당이 인민군 사령부로 사용됐는데 여러 이상한 일이 발생하자 원인이 성모상이라고 생각한 인민군은 총을 쏘았다.

그러나 7발을 맞고도 성모상이 부서지지 않자 기관단총으로 가격을 하게 되고 역시 총알이 피해갔다. 성모상을 끌어내리려 올라갔을 때 성모상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고 인민군들은 성모상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때부터 인민군은 성당에서 철수하게 된다. 성모상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칠고의 어머니' '매괴의 어머니'로 불리고 있다.



▶임 가밀로 신부

51년 동안 감곡본당에서 사목생활을 했다. 1947년 10월 25일 "성모여, 저를 구하소서"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평소 "나는 여러분을 만나기 전부터 사랑했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했는데, 이는 우리나라와 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열정을 잘 말해준다. 가밀로영성의 집과 성당 사이에 조성된 신부의 동상 밑 대리석에도 이 말이 새겨져 있다. 임 가밀로 신부는 프랑스 타르브교구 빌레아 두르라는 지방에서 태어났다. 그곳은 루르드에서 20km 떨어진 곳으로 어렸을 때부터 정기적으로 루르드를 방문해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며 성장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 프란치스코 교황 꽃동네 방문 일정

10:00 ~ 15:00 검색 시작 및 참석자 입장
15:00 ~ 16:00 '교황님을 기다리며' LED 동영상 상영
16:00 ~ 16:30 교황을 위한 묵주기도 '빛의 신비'
16:30 프란치스코 교황 꽃동네 도착
16:40 ~ 17:10 장애인들과의 만남
17:10 ~ 17:15 생명을 위한 기도
17:15 ~ 18:15 한국 천주교 수도자들과의 만남
18:30 ~ 18:50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지도자들과의 만남
19:00 프란치스코 교황 꽃동네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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