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랜서 칼럼] 변광섭 청주시문화재단 문화예술부장

서울 도성을 한 바퀴 돌며 역사문화의 향과 멋을 즐기는 기분, 전주 한옥마을 골목길을 자박자박 걸으며 느끼는 낯선 설렘, 군산과 대구의 근대문화유산 골목을 따라 떠나는 시간 여행…. 사람들은 왜 우리 지역에는 이처럼 멋진 공간이 없느냐며 아쉬워한다. 더 의미 있고 가슴 설레는 성안길과 근대문화유산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성안길은 천년을 이어온 거리다. 민본중심의 지방행정을 실천했던 곳이며 민족 지사들의 혼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이자 교육과 문화의 중심지다. 임진왜란 최초로 내륙전투에서 승리한 곳이다. 지금으로부터 422년 전의 일이다. 고려 말 홍건적의 침입 때 공민왕이 청주에 6개월간 머무르면서 과거시험 장소로 사용했던 망선루, 율곡 이이가 청주목사로 있으면서 만든 서원향약은 유교적 예절과 풍속을 향촌사회에 보급해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상부상조하기 위한 규약이 아니었던가.

용두사지철당간도 이곳에 있다. 국보 제41호인 용두사지철당간은 고려 광종13년(962)에 만들어진 것으로 용두사라는 절 앞에 세워져 있던 것인데, 절은 없어진지 오래됐고 철당간만 남아있다. 철당간의 높이는 65cm의 철통 20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래는 30단으로 높이가 20m에 달했고 꼭대기에 용머리가 있었다.

청주읍성이 있던 지역의 도로망이 남문에서 북문까지의 대로를 중심하여 방격(方格)으로 짜여져 있는 것은 고대의 경성방리제(京城坊里制)와 무관하지 않다. 고려시대 읍성이 홍수로 말미암아 훼손된 기록이 있으니 조선시대에 이르러 석축으로 고쳐 쌓기 시작해 1487년(성종 18)에 완공된 것으로 보인다. 읍성의 둘레는 1천640m, 성벽 높이는 4m 규모로 보고 있다. 이 안에는 13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모두 맑은 물이 샘솟아 연중 마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읍성과 연결되었던 남석교는 박혁거세 원년인 BC57년에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며 그 길이가 80m를 넘는다고 하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돌다리다.

그렇지만 지금은 청주읍성과 남석교의 기개를 찾아볼 수 없다. 읍성은 한일합병 직후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고, 남석교 역시 1932년 일제가 땅 속에 묻어 80여 년간 어둠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수령 900년을 살아 온 은행나무 압각수는 누가 잘났고 못났으며, 누구네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왔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읍성이 어떻게 만들어졌고 왜 허물어졌는지, 남석교의 가슴 아픈 사연이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단 한 번도 세상 사람들에게 천기누설을 한 적이 없다. 가볍게 듣고 가볍게 내뱉는 우리네와는 생각의 깊이가 다른 것이다.

성안길 주변에는 근대문화유산과 청주정신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 즐비하다. 역대 도지사 관사로 사용되었던 충북문화관은 일제시대의 건축양식과 오래된 숲속의 풍경이 조화를 이루는 아날로그의 향기로움이 끼쳐온다. 중앙초등학교 뒤에 위치한 우리예능원은 1924년 충북금융조합 사무실 용도로 일본인에 의해, 일본식 건축양식으로 세워졌다. 일제시대에는 청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으로 꼽히기도 했다.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6개의 청주양관은 서양의 건축양식과 한옥의 기법이 조화를 이루고 있고, 충북도청 본관 역시 일제시대에 적벽돌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또한 근대 초기의 모더니즘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는 충북산업장려관, 와우산 자락 작은 동산에 여덟 팔(八)자 모양의 양식으로 지어진 성공회성당, 일제강점기에 팔작지붕형태로 지어진 원불교 청주교당, 1923년 수질검사를 위해 종탑 형식으로 지어진 동부 배수지…. 이 모든 건축물들은 대성동, 탑동, 문화동 일대에 분포돼 있는데 이 일대에는 백년 안팎의 한옥이 수백 채 자리잡고 있다.

이곳이야말로 청주정신의 젖줄이자 샘물이다. 도전과 창조와 혁신을 두려워 하지 않은 청주 사람들의 정신, 청주만의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다양한 이야기로, 멋진 문화콘텐츠로, 감성적인 관광자원으로, 문화와 쇼핑이 조화로운 랜드마크로 특화하면 좋겠다. 9월 13일 펼쳐지는 청주읍성큰잔치를 함께하자. 아름다운 도전의 첫 발을 내딛자.
저작권자 © 중부매일 - 충청권 대표 뉴스 플랫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