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 우먼으로 승승장구하던 보희(조여정)는 한 순간의 실수로 회사에서 쫓겨난다. 아래층에 사는 성인용품점 사장 난희(클라라)의 물건과 자신의 물건이 섞이면서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안 보희는 난희를 찾아가 따지고, 그 일이 인연이 돼 보희와 난희는 친구가 된다. 이대로 자신의 직장 경력을 끝낼 수 없는 보희는 난희의 폐업 직전 성인용품점을 함께 꾸려가기로 한다. 보희와 난희의 사업은 성공하지만 여전히 일밖에 모르는 보희 때문에 남편 강성(김태우)은 점점 더 외로움을 느껴간다.

정범식 감독의 데뷔작 '기담'(2007)은 평범한 공포영화가 아니었다. 한국공포영화의 지상 과제는 '여고괴담'으로 대표되는 '관객 놀라게 하기'였다. 예외라고 한다면 김태용 감독의 1999년 작 '여고괴담2'와 김지운 감독의 2003년 영화 '장화, 홍련' 정도. 정범식 감독과 '기담'은 달랐다. 공포를 처연한 멜로로 승화시켰다. 멜로이면서 공포스러웠고, 공포스러우면서 동시에 슬펐다. 이 '다름'은 영화의 가장 큰 축인 서사를 구성하는 방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워킹걸'에서도 그런 새로움을 기대했다. 정범식 감독의 코미디는 어떤 것일지 궁금했다. 게다가 성(性)을 소재로 한 영화라니. 저속한 개그 소재로만 쓰였던 한국 섹스코미디와 어떻게 다를지 궁금했다. 하지만 반짝이는 아이디어 속에 감춰진 이야기는 매우 평범한 것이었다.

흥미로운 부분도 있었다. '워킹걸'은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눈에 띄는 영화다. 보희가 다니는 장난감 회사의 모습, 보희와 난희가 동업하는 성인용품 가게의 인테리어 디자인, 두 사람이 마케팅에 나설 때의 복장 등 미술에 꼼꼼하게 공을 들인 흔적이 보였다. 코미디 감각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욕설과 말장난은 최대한 아끼고 상황을 통해 웃음을 만들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조여정과 김태우, 김태우와 배성우의 호흡이 좋고, 고경표의 허를 찌르는 코미디 연기도 돋보인다.

하지만 영화의 이런 좋은 세부사항들이 기본 뼈대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호응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워킹걸'은 점수를 깎아 먹었다. 이 불협화음은 두 가지 측면의 문제로 보이는데, 서사와 디테일의 부조화가 첫 번째이고, 서사 자체의 평범성이 그 다음이다.

서사와 디테일의 부조화는 '워킹걸'이 성이라는 소재를 이야기의 기본 축과 잘 맞물려 돌아가게 하지 못한데서 비롯된다. 영화는 성을 코미디 소재로만 사용하고 있을 뿐 서사의 중심으로 끌어들이지 못한다. 난희라는 캐릭터를 통해 성담론을 펼치는 것처럼 보였던 초반부와는 달리 '워킹걸'은 중반부터 성을 성인용품으로 치환해 그것을 통한 소동극을 만드는 데 주력한다. 보희와 강성의 갈등을 절정으로 몰고가기 위해 사용되는 것은 성이 아니라 성인용품이다. 다시 말해, '워킹걸'은 '섹스' 없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 순간 '워킹걸'은 섹스코미디가 아니라 성인용품 코미디가 된다.

'워킹걸'은 워크홀릭이었던 여자가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워킹걸'은 이 평범한 이야기를 단 한 번도 뒤틀지 않고, 정직하게 밀고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좋은 서사는 대개 특별한 소재로 보편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낼 때 탄생한다. 소재와 이야기가 끈적하게 맞물려 있어야 가능하다. '워킹걸'의 성은 그 자체로 신선하지 않은데다 이야기와도 잘 어울리지 못해 오히려 메시지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촌스러운 상황에 놓인다. 정직한 것처럼 보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평범한 서사에 특별한 캐릭터가 있을리 만무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조여정이나 김태우, 배성우 같이 연기 잘 하는 배우들도 '워킹걸'에서는 평범해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어떻게 포장하느냐가 아니다. 이야기 그 자체다. 성을 소재로 했다는 이유만으로 수도 없이 반복된 이야기를 또 봐야할 이유가 있을까. 영화에 대한 궁금증은 궁극적으로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에서 나온다. 디테일에 힘을 쏟기 보다 먼저 이야기에 아이디어를 집어넣는 건 어땠을까. '기담'의 정범식 감독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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