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운동하려고 나왔다. 눈이 쌓였다. 13층 우리 집에서는 눈이 어느 정도 내렸는지 알아보기 어렵다. 또 급한 마음에 서두르다 보니 창밖을 내다볼 여유가 없었다.

모처럼 마음먹고 운동하려 했는데 눈 때문에 걸음이 무겁다. 밟아보니 발등에 잠길 듯하다. 이 정도 쯤이야, 새해 계획을 미룰 수 없어 옷깃을 세웠다. 바람도 차지 않아 걷기 좋다.

자목련 나무도 새롭다. 미끄럼 타듯 내려온 눈이 나뭇가지 사이에 모였다. 운동하려던 것을 잊고 나무 곁에서 한참을 바라는데 여기저기서 봐달라고 소리치는 듯하다.

지난 가을 맛있는 홍시를 먹게 해준 감나무도 만져보고 키 작은 모과나무 눈은 쓸어주었다. 차가운 촉감이 정신을 맑게 한다. 영산홍에도 눈길을 주고 소복한 눈을 덮고 있는 마른 강아지풀도 살피면서 산으로 가는 시간이 새롭다.

도서관을 품고 있는 산은 눈 때문에 더 가까워 졌다. 초입은 계단으로 오르게 되어 있어 오늘 같은 날은 조심스럽다. 계단도 가파르고 나무로 된 받침대는 오래되어 낡았다. 계단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에둘러 가야 한다. 잠시지만 멈칫한다. 오늘은 밖으로 나온 것만으로 만족하고 그냥 들어갈까. 출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의 바쁜 걸음 소리에 묻힌 내 걸음은 방향이 없다.

한 발자국은 산으로, 한 발자국은 집으로 간다. 걷고는 있지만 마음은 제자리다. 간판 불빛이 희미한 슈퍼 앞에서 망설이고 들기름을 짠 냄새가 아직도 남아있는 방앗간에서도 서성였다. 오토바이가 지나고 마주 오는 사람과 엉거주춤 피하는 동안 오랫동안 잊었던 눈 밟는 소리를 들었다.

나를 따라오는 소리, 뒤를 돌아보니 소리는 사라지고 발자국만 남았다. 겹겹이 쌓인 산봉오리 같기도 하고 라면 같은 신 발바닥 무늬가 선명하다. 올록볼록한 선이 각지고 단단할수록 나는 안전하게 산을 올랐다.

신을 신는 동안 나는 겉만 보았다. 마음에 들던 색깔이 바래지는 것만 안타까웠고 오래되어 낡고 더러워지는 것만 신경 쓰였다. 눈을 밟은 후에야 가장 낮은 곳에서 나를 지탱해준 존재를 느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습관적으로 계단 쪽으로 왔다. 젖은 나무계단은 더 검어 보였지만 눈은 없었다. 누군가 가장자리까지 깨끗하게 쓸어 놓았다. 계단은 안전하니까 어서 오라는 듯 두 팔을 벌리었다. 하나하나 오르는 동안 가슴이 훈훈해진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왜 눈 쓸 생각을 못했지. 이른 아침 느껴보는 눈도 고맙고, 이웃을 생각하며 눈을 쓸어준 사람도 고맙고, 내 집 가까이 있는 산도 고맙다. 아침부터 좋은 생각으로만 꼬리를 문다.

산길은 발자국으로 길이 났다. 많은 사람이 다녀가지는 않았다. 사잇길로 가면 숫눈길이다. 어떤 길로 갈까, 갈림길에서 마음이 멈췄다.

장자는 '길은 사람들이 다님으로써 생긴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길을 찾아다닌다. 걷기 위해 길이 생겨나고, 인기를 얻는 길도 있다. 관광수입이 되기도 한다.

나는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내 인생의 원(願) 하나는 제주 올레길 완주다. 해마다 몇 코스씩 걷고 있는데 꾸준히 이어진다면 계획을 이룰 수 있다.

그해는 오월이었다. 가파도 올레길을 시작으로 서귀포시 올레길을 걸었다. 기분 좋게 시작한 첫날과는 달리 이튿날은 물집이 생겨 걸음이 조금씩 늦었다. 숙소 도착 전에 해가 기울었다. 길 위에서 띄엄띄엄 만나던 사람들도 없고 해무만 어둠을 재촉하듯 활발히 움직였다.

멀리 가로등도 희미했다. 이대로 안개에 갇힐 것 같은 불안함이 더 할수록 발의 힘은 풀리고 불빛은 멀기만 했다. 산을 돌아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밭으로 들어가는 좁은 길이다. 한쪽은 감자밭이고 다른 쪽은 배추를 심었다. 한창 피기 시작한 하얀 감자꽃이 안갯속에서 묘연하게 속삭였다. 토실한 배추도 불룩한 배를 드러내며 초록빛 향기로 안아주는 것 같았다.

길은 좁았지만 초원을 걷는 듯 행복했고 편안했다. 하루의 피로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내의 시간에 만난 해무와 감자꽃과 초록빛은 나를 달뜨게 했다. 저절로 흥이 나왔다. 진도 아리랑이 생각났다. 지금 기분과 오늘 보고 느낀 것들을 개사하여 부르는 내내 으쓱거렸던 어색한 춤사위는 어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관객도 없는 밭길에서 즐기던 노래와 춤은 생애 첫 번째 무대였다.

남편과 대화가 궁할 때 그날의 일을 떠올리면 삭막했던 거리가 좁아지고 감정이 되살아난다. 마치 길의 어느 곳을 걷고 있는 착각이 든다. 보리수나무가 무성한 산길의 훈훈한 바람, 공동묘지를 지날 때 오싹한 기운, 귤 과수원 민박집. 그날 함께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들, 길이 아니면 만날 수 없는 소중한 인연이다.

길은 추억을 떠올리게 한다. 맨발로 걷던 해순 해수욕장 파도소리. 간절하게 먹고 싶었던 커피. 발바닥에 물집이 터져 쓰리고 아리던 통증. 지팡이에 의존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마음의 비듬을 털듯 버거운 생각을 버리고 나면 한결 가벼워지는 나를 보게 된다. 별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고 어울리지 않은 것으로 나를 치장하고 있었음도 안다. 내 몸이 아프고 힘들수록 말은 줄어들고 말로 상처를 주고 잃은 것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걷는 동안 포기하고 싶던 순간이 많았다. 그러나 순간의 갈등이 새로운 용기를 주었다.

갈등을 겪을 때 세 가지 요소에 의해 행동이 나타난다고 한다. 남의 이목을 생각하여 마음과 다른 행동을 하며, 타인의 강요에 의하여 억지로 행동하고 또는 누가 뭐라든 내 의지대로 하는 행동이다.

눈 쌓인 산길에서 나를 본다. 오늘은 어떤 길로 갈 것인가. 산은 고요하고 나를 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약력

▶1996년 '창조문학'으로 등단

▶청주예총, 예술공로상 수상, 충북수필문학상 수상, 허균문학상 수상 외 다수

▶수필집 '뒤로 걷는 여자', '꼬리로 말하다'

▶충북수필문학회 사무국장, 청주문인협회 회원, 여백문학회 회장 역임

▶이메일 jojo4876@hanmail.net



※ 이번 주부터 조영의 작가가 '삶과 수필' 필진에 새롭게 합류해 우리 일상에서 느끼는 잔잔한 행복과 감동을 전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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