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부시론] 표언복 목원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별 하나에 추억과/별 하나에 사랑과/별 하나에 쓸쓸함과/별 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 없을 윤동주의 시<별 헤는 밤> 넷째 연 전문이다. 꿈 많은 소녀가 아니라도 깊은 밤하늘의 영롱한 별빛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읊조리게 되는 시구일 테다. 나는 젊은 날 지리산 연하천 대피소 마당에 누워 하늘이 무너져 내릴 듯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며 이 시를 외던 날의 추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밤 내가 본 별은 시골에서 나고 자란 내가 그때껏 수 없이 보아온 것보다 훨씬 많고 몇 배나 더 큰 것이었다. 어둠이 깊을수록 영롱해지는 별에 빗대어 시대를 탄한 시인의 통찰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속으로만 외다 혀를 굴려 다시 읊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자위가 젖어들고 있었다. 읽으면 읽을수록 아름답고 새기면 새길수록 가슴을 울리는 것이 윤동주 시의 힘이다. 식민주의하의 현실을 무덤에 비유한 이는 염상이었다. 윤동주는 바로 그 무덤 속 같은 현실과 견결하게 맞서 있으면서도 맑고 영롱한 서정성을 잃지 않고 순결한 민족적 정서 속에 아름답게 형상해 내고 있는 시인이다. 스물일곱 짧은 생애를 일기로 어둠의 어둠 속 같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단말마의 외마디 소리를 남기고 이슬처럼 스러져간 윤동주를 '민족시인'이라 이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대대로 기리며 그 시심을 본받아야 마땅할 일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한 듯싶어 안타깝다.

1992년 8월, 일행은 중국 용정시 외곽의 한 공동묘지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윤동주의 묘소를 참배하러 간 길이었다. 1985년, 맨 처음 묘소를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연변대학의 고 이해산 교수가 앞장서 안내를 하는데도 열다섯 명이나 되는 일행은 묘소를 찾아내지 못하고 한 시간 넘게 애를 태워야 했다. 그러는 사이 해가 기울어 어둠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이리 저리 봉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가쁜 숨소리 속에서 일행 중 한 사람이 물었다. "그런데 윤동주가 무엇을 한 사람이죠?" 초로의 미대 교수였다. 마침내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사진에 담아 산을 내려오는 동안 머릿속은 온통 윤동주 대신 그가 누구이었는지를 묻던 동료에 대한 생각으로 복잡해져 있었다. 그러나 윤동주의 시가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지 않으니 50~60년대에 중요한 수학기를 보냈을 그로서는 그럴 만도 한 일이다. 독서량의 한계나 지성의 빈곤 따위는 내가 탓할 만한 일이 못되는 것.

신입생 면접이 빠지지 않던 시절의 얘기다. 학과의 특성상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묻게 되는 일이 잦았다. 진행하다 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의 답이 천편일률적이라 할 만큼 똑같은 것이었다. 그랬다. 소설은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시는 윤동주의 '서시'가 단연 압도적이었다. 극히 소수의 학생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윤동주의 '서시'를 가장 좋아한다고 답했다. 드물게 '별 헤는 밤'을 들기도 했다. 한 구절을 외워 보라고 하자 판에 박은 듯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가 빠지지 않고, '별 하나에…' 우물우물하다 그리 더 나아가지 못하는 것도 거짓말처럼 똑같았다.

돌보는 이 없이 이국의 공동묘지 속에 방치돼 있던 묘소를 맨 처음 찾아내 일반에 알린 이는 일본인 오무라 마쓰오(大村益夫)교수였다. 그는 1985년 연변대학에 교환교수로 있으면서 윤동주의 행적을 발굴 조사하고 그의 전기를 복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윤동주의 작품과 연구 자료들을 찾아내어 1999년 사진판 '윤동주자필시고(詩稿)전집'을 간행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순수한 학문적 열정의 산물이니 굳이 따질 일은 아니지만, 민족 시인 윤동주 연구가 일본인 학자에 의해 선도되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지난 16일은 윤동주 서거 7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그러나 '저항시인' '민족시인' '순수 서정시인' 등의 그럴싸한 수식을 달아 칭송하기는 하지만 그의 시와 시 정신을 제대로 알고 본받고자 하는 노력은 드러나 보이질 않는다. 이날 일본에서는 니시오카 겐지(西岡健治) 후쿠오카현립대 명예교수가 중심이 되어 '후쿠오카 윤동주 시비 건립위원회'를 발족시켰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 '민족시인'의 시세계를 연구하고 기리는 일을 더 많이 일본인들에게 빚지고 있는 현실은 아무래도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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