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청주의 대표적 유적인 청주읍성은 일제 강점기 초기인 1911년~1914년 사이, 「시가지 개정」이라는 미명아래 모두 헐려져 하수도 개축에 사용됐다. 청주읍성의 해체는 도시 근대화라는 그럴싸한 미명아래 저질러진 만행인데 여기에는 임진왜란때 의병, 승병에게 패퇴한 앙가픔 심리가 다분히 작용한 듯 하다.
 청주읍성이 송두리채 망가지는 역사의 아픔속에서도 불행중 다행으로 청주읍성의 옛 터가 그대로 남아 읍성 복원에 한가닥 희망을 던저 주고 있다.
 길이 2km, 성벽 높이 3m 안팎, 두께 4~6m로 쌓은 청주 읍성은 현재 4대문의 표석이 그 실존을 말해주고 있다.
 지난 1994년, 박상일씨(청주대박물관 학예관)가 비문을 짓고 문화사랑에서 이를 추진하여 자연석에 그 유래를 새겼다. 4대문이 있던 자리에 위치한 표석 앞면에는 청남문(淸南門:남문) 벽인문(闢寅門:동문) 청추문(淸秋門:서문) 현무문(玄武門:북문)의 명칭을 새겼고 뒷면에는 4대문의 유래를 개괄적으로 적었다.
 4대문의 정확한 위치도 모르고 지냈던 그전에 비하면 엄청난 의식의 변화다. 여기에다 읍성 자리가 모두 인도(人道)로 변해 쉽사리 그 흔적을 알아볼 수 있다.
 청주백화점 입구의 동문에서 인도를 따라 북진하다보면 상당공원 맞은편, 지하도 입구에서 살짝 왼쪽으로 꼬부라진다. 이는 성의 모퉁이가 각이 진 것이 아니라 둥글게 처리됐기 때문이다.
 구 히아신스 예식장 앞에는 전기공사를 하다 나온 수톤의 성돌이 놓여 있다. 기단석도 보이며 확(구멍이 나 있는 돌)도 있다.
 장글제과 쪽으로 건너는 북문터를 자세히 보면 문터가 약간 어긋나 있다. 이는 옹성(甕城)의 약식화된 형태인 적대(積臺)가 있던 흔적이다. 문 앞에 약간 튀어나온 성벽을 쌓아 문으로 침입하는 적을 대각선에서 공격하기 위한 설계다.
 대한투자신탁 앞에서도 완만히 왼쪽으로 꺾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흥미있는 사실은 성밖의 건물이 곡선으로 돌아가는 성벽을 따라 현재도 삼각지를 형성하며 들어서 있다는 점이다. 이같은 현상은 성벽의 네 귀퉁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청주YMCA에서 남사로를 건너 남주동 재래시장으로 성벽은 건너간다. 이곳에는 70년대에 염색공장이 있었고 하수도가 흘렀다. 이곳도 성벽의 모서리이기 때문에 길이 비스듬하다.
 조흥은행 앞에 이르면 제일 큰 청남문인데 이곳 광장이 유난히 넓은 것은 청남문 앞을 보호하던 옹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옹성이란 독을 반쯤 쪼갠 형태로 적의 침입을 차단하는 보호 시설이다. 철옹성(鐵甕城)이란 말은 바로 이런 형태서 나온 말이다.
 조흥은행 앞에서 간선도로로 빠지는 골목길을 가다가 성벽은 수성 아케이트에서 다시 왼쪽으로 고개를 트는데 이곳 역시 성모퉁이의 삼각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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